남편도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 서리가..

슬럼프! 너도 내가 처음이지? #프롤로그

by 런던남자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 여정의 99%는 비극의 연속이다."


와인 잔이 출렁였다. 제법 깊고 밝은 밤이었다. 외로움은 노크도 없이 갑자기 그가 들고 있던 와인잔에 빠져들었다. 크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길고 긴 런던의 겨울이 막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겨울의 터널에는 어둠과 우울이 일상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겨울을 견디어내는 일은 리듬을 타는 것이었다. 리듬을 잃지 않은 대가는 해마다 찬란하였다. 아름다운 봄의 향기가 그 리듬을 아주 조금씩 밀어내기 때문이다. 수선화가 고개를 내밀기 무섭게 시작되는 런던의 봄은 여전히 쓸쓸하다. 봄의 의미는 선물이었다. 겨울을 견딘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봄은 빠르지는 않지만 경퀘한 리들을 타고 있었다. 그 또한 봄의 리듬을 즐길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미 어두워졌고 밤이 찾아왔지만 봄의 밤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정원으로 난 거실의 큰 창을 통해 봄밤과 대면하려던 찰나였다. 하늘은 맑고 검푸르게 스잔하였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순간 이상한 감정과 대면해야 했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감정은 묵직하였다. 그 감정은 닫힌 정원의 창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단 침입이었다. 그 감정은 사정없이 그의 와인잔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둘째 아들 검은 고양이마저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직원도 의미 없는 타인이라는 생각이 강타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 그는 혼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살짝 흔들었다. 그 안에 작은 파도가 일렁였다.


그 파도 속에 일렁이는 감정은 이전과는 다른 외로움이었다. 외로움의 파장은 불규칙했고 길지 않은 파동을 남긴 채 잔잔해졌다. 그는 끝내 와인 잔을 비우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갑자기 명치 부근에 통증이 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신선한 산소가 필요했다. 현관문을 열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어둡지도 환하지도 않은 봄밤과의 첫 조우였다. 그의 불규칙한 심호흡이 몇 차례 지속되다 진정이 되었다. 들숨에는 슬픔이 빨려 들었고 날숨에는 외로움이 묻어났다. 피처럼 외로움에도 색깔이 있다면 휴지나 소매자락으로라도 닦고 싶었다. 그는 습관처럼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찾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는 2층에서 잠들어 있었다.


It is what it is" 인생은 그렇고 그렇다.
(전) 주한미군 의무 사령관 울굿 대령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에너지가 넘치던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가 엄습하곤 하였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도 만사가 귀찮아졌다. 물론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서열 3위의 고양이마저도 그 시간에는 잠을 잤다. 퇴근해서 그가 첫 번째 하는 일은 고양이를 깨우는 것이었다. 야행성인 고양이는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한다. 그런데 그의 고양이는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잔다. 사냥하느라 밤잠은 짧았지만 낮잠은 길었다. 깨우지 않으면 어둠이 찾아와도 일어나질 않는다. 녀석은 마지못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다. 사지를 늘어뜨리며 스트레칭을 한다. 겨우 일어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하나 마나 한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고양이가 나간 그의 집에는 적막으로 가득하다. 식사시간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도 웃음소리도 대화도 없다. 물론 대화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유독 침묵에 맥을 못 추었다. 침묵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보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그를 끝도 없이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아내가 쓰러졌다. 구급차가 왔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그 또한 알 수 없는 우울로 시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힘이 들었는데 아내마저 쓰러지면서 그는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내 못지않게 그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내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남편이었다. 그것도 무늬만 남편이었다. 그가 경제력마저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일찍 포기를 당했을 것이다. 가장이라는 자리는 그의 어깨를 짓누를 뿐이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장은 돈이나 벌어오면 그만이었다.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죽고 싶었지만 죽는데도 용기가 필요하였다. 세월이 지나면 어차피 죽을 것이다. 죽는 것은 좀 더 먼 미래 일로 남겨두었다. 그는 삶의 의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는 그대로 슬럼프를 견뎌내야 했다. 그 일마저도 각자의 몫이었다. 다독여 주고 공감해 주지 못하는 아픔은 더욱 큰 상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마저도 토닥이며 위로해줄 힘조차 없었다. 최악의 슬럼프는 그를 더욱더 깊고 촘촘한 늪으로 빨아들였다.


선택은 언제나처럼 그의 아내 몫이었다. 몇 년 후 그는 결국 퇴출 명령을 받았다. 영국 런던에서 아내 성씨를 사용해야만 했던 것도 모자라 버림까지 당한 것이다. 기가 차고 하늘이 무너졌다. 아내의 선제공격은 매서웠고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허무했다. 그는 길거리의 버려진 개나 고양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신세가 버려진 개나 고양이와 다를 바 없었다.


가장들도 남편이고 아빠이기 이전에 꿈 많은 청년이었고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40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가장들의 수난은 아내들의 호르몬 변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아내들은 왜 남편을 바퀴벌레 보듯 하거나 폐기 처분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경로로 그 과정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자칫하면 거대담론에 빠질 수도 있다. 성대결로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기로 하였다. 수많은 중년 가장들의 힘든 어깨에 올려진 벽돌을 내려주고 싶었다. 그들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있는 응어리들을 풀어주고 싶었다.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온다는 말이 있다. 여자만 한이 맺힌다는 편견을 깨 주고 싶었다. 가장들도 남편이기 이전에 본능과 감정을 가진 남자다. 한때는 꿈 많던 소년들이었고 건강하고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었다. 집에서는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 가장들이 죄인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라도 그 가장들의 서러움을 대변해주고 싶다.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배터리를 충전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정말 방전된 폐 배터리였다.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충전을 해서 쓰고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휴대폰처럼 새로운 배터리로 교체할 수도 없다. 그는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충전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 충천 방법은 전기 플러그에 전원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었다. 좀 특별한 방식으로 충전 중이었다. 그 방식은 바로 글쓰기였다. 매주 한 권 책 쓰기 프로젝트는 그만의 충전 방식이다.


그가 중점을 두고 싶은 글쓰기 대상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중년의 가장들이 느끼는 압박과 서러움들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이 타깃이다. 요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가장의 어깨만큼 무겁고 고달픈 어깨가 또 있을까? 이제라도 그 가장들의 무거운 어깨에서 벽돌 한 장이라도 내려 주고 싶다. 그들이 왜 그토록 외롭고 힘든지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분석도 잊지 않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이 보는 다른 가장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페미니즘이나 남성우월주의 같은 성대결 양상에는 관심조차 없다. 늠름하고 믿음직해야 만 했던 가장들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제법 많은 가장들을 만났다. 그 가장들의 솔직한 심경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 가장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남편이자 가장인 남자 사람들로 한정하였다.


대부분의 가장들은 고개는 뻣뻣하지만 어깨가 처져 있다. 강하지만 약하고 당당하지만 외롭다. 언제나 누군가와 같이지만 혼자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손이라도 한번 따뜻하게 잡아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구별에 살고 있는 아내가 있지만 눈칫밥을 먹거나 외로운 가장 일동!>




슬럼프! 너도 내가 처음이지? (2019년 11월 18일 / 하루 만에 책 쓰기로 제작된 책의 일부임)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0명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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