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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30. 2019

여보, 시간 나면 우리 이혼할까? 4

결혼식과 신혼여행

2부. 결혼과 이민

1. 최고의 효도

     

한국을 떠나서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었던 꿈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의 7년이라는 직장 생활을 했던 이유도 바로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효도가 바로 결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효도이고 대단한 일이냐고 하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셨을 것이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직접 나서서 선 자리를 주선하고 다녔을까? 시골마을에서는 어머니는 중매로 제법 짭짤한 수입을 창출하고 계셨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풍수지리에 능한 아버지는 지관이라는 부업으로 집터나 묫자리를 잡아주고 쌀 한가씩을 받아오셨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중매가 성사되면 쌀 한가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떡 방앗간을 유지하면서 실제로 지역 유지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중매에 관여하였고 실제로도 수없이 많은 커플들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오지랖이 만들어낸 사업이었다. 정작 자신의 넷째 아들은 어떻게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중매에 매달리는 어머니 입장을 위해서도 때를 넘기고 있는 나의 결혼은 집안의 우환이었다. 그 우환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민을 떠난다면 평생 어머니 마음에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주선하는 선 자리에도 몇 번 나가보고 적극적으로 결혼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빨래터에서 이불을 빨다 만난 처자가 있고 곧 결혼도 할 것 같다는 소식에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였다. 급하게 이루어진 상견례에는 양가 어머니만 참가하였고 급하게 결혼 날짜가 잡혔다. 나는 장인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지만 아내는 그럴 시간이 나질 않았다. 아니 내가 시간이 나지 않았다. 예비 신부 혼자 시댁으로 인사를 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전화로만 인사드리고 시아버지 되실 분은 2주 후 결혼식장에서 뵙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처럼 형식과 절차를 무시하고 급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는 자랄 나라에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론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일은 아이에게 죄를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미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렇지 못한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럴 기회를 아무도 차단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단지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효도는 무지막지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속수무책의 결과로 퇴직을 하고 이민을 가고 아이를 영국에서 낳아 기르게 된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여기에는 아내의 도움과 동조가 결정적이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여기서나마 전하고 싶다.

     

     


     

 2. 결혼식

     

아내를 만나지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만나 횟수로 치면 10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절차나 형식을 무시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들 결혼해줘서 고맙다는 식의 인사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노총각, 노처녀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나와 아내의 나이는 전형적인 노총각, 노처녀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결혼식 자체도 생략하려 하였다. 나나 아내는 형식적인 치장이나 의식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결혼식 자체도 허례 의식이나 지나친 형식이라고 비판하며 가족들만 모시고 간단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오지랖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인 어머니의 반대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반대 이유는 자명하였다. 그간 뿌려놓은 돈이 얼마인데 결혼식을 하지 않으면 그 돈을 다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설득을 당하고 급하게 예식 준비에 들어갔다. 방배동에 위치한 예식장을 잡고 찍어내 듯 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3. 신혼여행

     

다시 결혼하라고 하면 자신이 있다고 할 만큼이나 결혼식은 엉망이었고 실 수 투성이었다. 거기에다 마지막 과정으로 피로연이 남아있었다. 여러 모임에서 참석한 친구들은 여기저기서 피로연을 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야만 했다. 신혼여행도 웨일스라는 낯선 곳으로의 멀고도 먼 여행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뚝딱 치르고 나서 우리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비용 정산이었다. 예식장 비용과 음식 값 그리고 관광차 대여로까지 지출해야 할 돈은 많았다. 이런저런 돈을 다 지불하고 난 다음에 우리의 순 수익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 남았다. 그렇게 남은 돈은 천만 원 정도였다. 그 돈은 아버지 어머니가 사람 노릇하려고 평생을 뿌려놓은 돈이었다. 우리는 그 돈을 챙겨서 정신없이 공항으로 향하였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오늘이 우리 결혼식 날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결혼이 끝났다는 것을 공항에 와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까지 바래다준 친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우리는 비행기를 타려다가 티켓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행시간은 그다음 날 오전이었다. 그래서 공항 인근의 호텔에 예약까지 해놓은 상태였는데 깜빡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방배동 인근의 피로연장으로 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호텔에 들어가 1박을 하고 다음날 영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는 양가에 영국 웨일스로 신혼여행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연히 34일 정도로 제주도나 동남아로 다녀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양가에서는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1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양가에서는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웨일스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화려했지만 어이없는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사랑이라는 것의 허무함을 애써 부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이나 그 간극은 넓어져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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