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의 사회문제를 연제 하다
여동생이 100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날 나는 사승봉도라는 무인도에 있었다. 그 무인도에는 관리인이 한분 거주하고 있었다. 그를 소장님이라고 불렀다. 그 소장님은 사유지인 무인도 주인이 관리인으로 채용한 직원이었다. 무인도는 사유지였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고 전입신고도 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주민이 5인 이하이면 실제로 거주하여도 무인도로 분류된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1박 2일의 짧은 무인도 체험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기행이라는 EBS 방송국의 촬영 팀과 함께 촬영차 들어갈 기회가 주어져서 가능했던 체험이었다. 촬영 테마가 무인도에서 살아남기와 같은 일종의 서바이벌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별다른 식량을 준비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간 초코파이와 라면이 없었더라면 일행 7명은 단식 아닌 단식을 할 뻔했다. 당황하기는 우리 체험 팀이나 방송국의 촬영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굶주림을 제외하면 무인도는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갈매기나 검은 머리 물떼새들의 울음소리와 파도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텅 빈 공간은 예상과는 달리 삭막하지도 황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포근하게 우리를 받아주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지만 그런대로 재미도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갯벌은 예상과는 달리 모래사장이었다. 서해안의 해변은 대부분 갯벌인데 반해 이곳 무인도는 달랐다. 이처럼 넓은 백사장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서해안에서 느끼는 감정보다는 동해안의 바다와 백사장이 옮겨온 듯하였다.
현실 속의 무인도에서 나는 자판을 두드리며 끊임없이 글들을 써내고 있었다. 촬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무임승차한 얌체 불청객이었다. 무인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설정이다. 그런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비록 일행의 멤버들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 당당해졌다. 직업으로서의 나의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작가와 무인도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현실 속의 무인도에서 비현실 같은 일들이 무인도에서 글을 쓰는 일의 의미였다.
어두워지자 일행은 텐트에서 야영을 하였고 촬영 팀은 대피소로 퇴근하였다. 촬영장비의 충전이 필요해서 야영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박쥐처럼 촬영 팀의 일원으로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근사하게 보냈다. 대피소에는 민박 형태의 방이 있었고 우리는 그 방에서 호화로운 민박을 하였다. 일찍부터 장작불을 때 두어서 방바닥의 구들장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전기는 없어서 발전기를 돌려야 전기 사용이 가능하였다. 비록 찬물이었지만 수돗가에서 씻고 양치질을 할 수 있으니 살 것 같았다. 신발 속에는 고운 모래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구들장에 엎드려서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촬영 팀의 감독이 내 바로 옆에 자리를 하였고 그 옆에는 피디가 누워서 야구를 보고 있었다. 물론 휴대폰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두산과 엘지의 경기였다. 두 팀 모두 서울이 연고지인 팀이다. 두 사람은 따뜻한 구들장에 배를 깔고 어느 팀인가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야구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야구를 통해 서울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잠깐이지만 무인도에서까지 와서 서울을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서울은 인구가 천만인 거대 도시다. 서울 인근의 수도권이라 불리는 지역까지 합하면 이천만이 넘는다. 천만이나 이천만의 숫자는 물론 사람의 머릿수를 헤아린 숫자이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는 몇몇 지인을 빼고는 모두가 철저하게 타인으로 살아간다. 평생을 살아도 길거리에서 지인과 우연하게 마주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지인이 적은 사람일수록 서울이라는 곳은 무인도나 다름없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결코 뭉쳐지지 않는 모래알에 불과하다. 천만이나 이천만 이라는 수치는 무인도의 광활한 해변에 깔려있는 모래알 같은 의미일 뿐이다. 모래알은 아무리 쌓아도 무너지고 마는 모래성의 재료다. 모래알 하나하나는 단단하지만 결코 뭉쳐지지 않는다. 우리 국민의 특징을 모래알 같은 국민이라고 표현하던 시절도 있었다.
현실 속의 무인도에 와서 비현실 속의 무인도를 생각하게 된 것은 무인도의 특성 때문이다. 무인도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고립된 섬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단절은 사승봉도나 서울이다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무인도는 서울이었다. 인구 천만은 모래알 같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타인들의 숫자에 불과하다. 모래는 시멘트라는 매개체가 있어야만 비로소 콘크리트라는 단단한 물질로 뭉쳐질 수 있다. 서울에서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시멘트 같은 특정 매개체가 없으면 뭉쳐질 수 없다. 영원히 타인들의 도시에 타인들과 함께 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타인이 주는 의미는 외로움이고 슬픔이다. 상실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남의 삶의 의미까지 물으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존재의 이유는 나의 의지의 영역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외로움까지도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단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놀랍게도 사승봉도에는 검은 머리 물떼새가 살고 있었다. 마침 산란기여서 알들이 백사장에서 발견되었다. 둥지도 따로 없었다. 바닷물이 미치지 못하는 바위 근처의 모래 위가 둥지였다. 멸종위기종인 검은 머리 물떼새는 천연기념물로 개체수가 아주 적다고 한다. 머리와 몸 위의 검은 깃털, 부리와 발의 붉은색 등이 특징인 조류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의 무인도 일대에 거주하며 부리가 유난히 길어서 조개를 캐먹기에 알맞게 진화된 새이다.
우연히 백사장에서 발견한 검은 머리 물떼새의 알은 두 개였다. 노란색과 푸른색이 조합된 색상에 옅은 검은색 반점들이 있어서 모래 위에서 보호색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라면 삶는데 넣어서 먹을 뻔하였다. 갈매기 알인 줄 알고 천연기념물의 알을 먹는 만행과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다. 물론 갈매기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만큼 검은 머리 물떼새는 희귀종인 새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무인도에서 만난 여사장님이라는 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사장님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중년 여성으로 무인도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다. 해변의 일부를 임대하여 캠핑장과 캠핑시설 임대를 하고 있었다.
여사장님은 검은 머리 물떼새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사를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본인이 무인도를 찾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분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소설로 써도 몇 권은 될 분량의 이야기를 1박 2일 동안 마주치기만 하면 끊임없이 하고 또 하였다. 그 절정은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대피소에는 방이 세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관리소장님이 쓰고 나머지 두 개는 민박으로 사용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촬영 팀은 누룽지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촬영 장비를 챙겨서 다시 해변으로 향하였다. 대피소에는 관리소장님과 여사장님 그리고 나만 남게 되었다. 관리소장님은 커피를 아주 좋아하셨다. 나에게 끊임없이 커피를 따라 주셨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커피가 촉매제가 되어 우리 세 사람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역시 여사장님이었다. 그분의 굴곡진 인생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였다. 관리소장님의 인생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의 특징은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간직한 채 무인도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분이 부부 사이인 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나도 처음에는 부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사장님은 인천의 집에 남편이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그 남편이 자신을 갉아먹었던 존재였지만 끝내 남편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 회환의 세월이 무인도로 자신을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무인도의 대피소는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피소라기보다는 살림살이가 가능한 한 채의 민박집이었다. 다만 전기가 없을 뿐이었다. 전기가 필요하면 발전기를 돌려야만 하였다. 그래서 밤에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전날 저녁에 대피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어두워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이른 저녁인데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가득 차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별들은 단지 하나의 점이었다. 그 별들의 대부분은 지구보다 몇 배나 크고 거리도 평생을 여행해야 도달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인근에 있는 제법 큰 섬인 승봉도에서는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확실하다. 전열 등의 불빛들이 유난히 빛을 발하며 섬의 존재감을 무인도에게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인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기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인간의 문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무인도에게는 주어졌다. 그래서 무인도는 더욱 텅 빈 충만을 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맞이한 대피소의 풍경은 엘도라도였다. 50년 이상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아침을 맞이하였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아침은 처음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황홀해서 눈이 부셨다. 절벽 아래는 파도가 연신 폭이 아주 좁은 해변을 공략하고 있었다. 이태리나 그리스의 아름다운 지중해 섬들보다 훨씬 멋지고 근사하였다.
관리소장님으로부터 연신 제공되는 모닝커피는 맛이 없는 일반 인스턴트커피였다. 커피의 맛이 원두를 볶는 기술이나 생산지에 따라 천차만별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서도 이렇게 달라진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비록 인스턴트커피였지만 최고의 커피였다. 커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누는 세 사람 간의 대화는 슬펐지만 아름다웠다. 어느새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토닥여주고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타인들을 쉽게 관계의 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마력이 무인도에는 있었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맞이한 황홀한 아침은 단지 경치만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관리소장님과 여사장님이라는 사람들이 개입이 되어있었다. 이 분들이 없는 무인도였다면 나는 텅 빈 백사장과 바다와 작은 산들만 보다가 왔을 것이다. 말 그대로 무인도만 보고 왔을 것이다. 물론 천연기념물인 검은 머리 물떼새 몇 쌍과 그들의 알도 보았지만 그들과 교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와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겐 나는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였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토박이와 침입자와의 만남이었지만 검은 머리 물떼새는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한 만남이었고 서울의 천만이라는 모래알들과는 달랐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여사장님이었다. 여사장님은 첫날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사장님이 이야기를 하면 나는 듣는 편이었다. 시시콜콜한 개인사부터 남편 문제 심지어 재산 문제까지도 털어놓으셨다. 내가 그만큼 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작가라는 특이한 신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 대하는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편해서이거나 아니면 여사장님이 심하게 고립감을 느낄 만큼 외로워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두 가지 다일 수도 있다.
여사장님의 이야기는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느낀 배신감과 고립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자녀들은 성장해서 독립을 하고 항상 빈집을 지켜야만 하는 그 마음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아직도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 보였다. 대화를 이어갈 때 안면 근육이 수축되며 눈동자는 많이 흔들렸고 가끔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픈 이야기들이 이어질수록 참고 견디어 낸 여사장님의 고립 감속에는 외로움과 회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밝고 적극적인 사람들의 특징이 아픔이나 상처가 많다는 사실은 아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병을 얻기 전에는 굉장히 사교적이었던 사람들이 많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소장님은 기회를 보고 있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살며시 풀어놓으셨다. 소장님의 인생 또한 여사장님 못지않게 파란만장하였다. 여사장님이 주로 정신적인 고통으로 힘들어하셨다면 소장님은 육체적인 고통이 더 많았다. 두 분 모두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인생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은 잘 대변하고 있었다. 소장님은 16세 때부터 시작된 노동일을 60대 중반까지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섬을 지키며 심한 일은 하지 않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육지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었다. 대피소의 아침은 갑자기 토론장이 되어 버렸다. 각자의 넋두리를 쏟아낸 다음에는 질문의 화살이 자연스럽게 나로 향하였다.
나의 인생사를 무인도에서 처음 만난 타인들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 또한 굴곡진 인생이었고 아픔과 외로움에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다. 특히 40대 중반의 후기 청년기부터 시작된 이름 모를 고립감은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심하게 흔들렸던 시기였다.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다 보니 두 분 모두 귀를 쫑긋하고 들으시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 만나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일이 무인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 살고 직업이 작가라는 다소 이색적인 인생이어서 더욱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아침의 햇살은 벌써 중천에 떠올라 모래사장과 바다를 동시에 반짝이게 만들고 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날의 나의 마음의 상처를 살포시 꺼내본다. 만지기가 두려워 눈으로만 감상한다. 두 분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시는 눈치였다. 그렇게 잠시 대화는 중단되었다. 소장님은 다시 커피를 따르신다. 커피 잔에서도 고운 모래알이 씹힌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의 대피소에서 좋은 타인들과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게 된 인연이 너무 감사하였다. 이분들과의 헤어질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나는 해변의 촬영장에 가서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였다.
촬영이 끝나고 무인도를 떠나기 위해 어선을 기다리는 사이에도 여사장님의 친절은 멈추지 않았다. 어선은 출발했다고 하였지만 승봉도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어선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형체만으로 가능하신다고 하였다. 삼십여 분을 더 기다린 끝에 마침내 기다리던 어선이 왔다. 사다리가 내려지고 일행은 차례로 배낭과 촬영장비들을 배에 올린다. 사다리가 치워지기 무섭게 작은 어선은 굉음을 내며 승봉도 선착장을 향해 달린다. 배가 떠난 해변에서는 여사장님이 계속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여사장님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면서 마침내 하나의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우리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작아지는 여사장님이 느끼는 외로움은 연한 아메리카노가 아닌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느낌이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작은 무인도에서 큰 무인도를 발견하기까지에는 여사장님과 관리소장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나는 끝내 사승봉도라는 작은 무인도에 외로움이라는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한 채 배에 올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