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길을 걷는 하루 (무농)

감사한 일

by 나무나루주인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길을 걷는 하루 (무농)


주말 아침, 아내와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 들른 큰딸과 함께 근교로 나들이를 나섰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작은 추억 하나를 더 쌓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 팔당대교를 건너는 길,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강과 산의 풍경이 주말의 시작을 한층 부드럽게 열어 주었다.


우리가 먼저 향한 곳은 운길산 자락에 자리한 수종사였다. 오래전부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찾곤 하던 산사다. 경내에 들어서자 도시의 소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대신 바람과 새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채운다. 산사의 고요는 사람의 마음을 서두르지 않게 만든다. 그 속에 잠시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의 결이 한층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고, 마음속 공간이 넓어지는 듯했다.


경내 한편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약 500년의 시간을 살아온 나무라고 한다.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 수많은 계절을 건너온 그 나무 앞에 서 있으니 시간의 깊이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세월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동시에 그 긴 세월을 버텨온 생명의 힘 앞에서 묘한 경외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또한 장관이다. 멀리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길로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질서와 조화 앞에서 마음이 절로 겸손해진다.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 깊은 곳까지 맑은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자연은 언제나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짧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내릴 때마다 아직은 다리가 든든하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몸의 건강이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의 바쁨 속에서는 쉽게 잊고 지내던 감사가 이런 조용한 순간에 문득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산사를 내려온 뒤에는 운길산 아래의 ‘운길산다보록’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미나리 전과 해물수제비, 그리고 수제 돈가스를 주문해 셋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음식이 특별히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둘러앉아 웃으며 나누는 식사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한 시간이었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대화 속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피어났고, 그 웃음 속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평범한 식탁이지만 그 안에는 소소한 행복이 가득했다.


점심을 마친 뒤 우리는 여유당과 다산 정약용 유적지를 찾았다. 조선 후기의 위대한 사상가 정약용 선생의 삶과 정신이 깃든 곳이다. 기념관과 실학관을 둘러보며 그의 삶을 다시 떠올렸다.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견디면서도 나라와 후손을 위해 5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을 읽다 보니 감탄과 함께 숙연한 마음이 밀려왔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과 실천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다산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한 사람의 진지한 사유와 노력은 시대를 넘어 후대의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나 역시 내 삶의 방향과 태도를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다.


이후 팔당의 풍경이 보이는 카페에 들르려 했지만 주차장이 가득 차 있어 근처의 작은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그동안 바쁜 일상 속에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 놓았다. 가족과 마주 앉아 아무런 서두름 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말없이 함께 앉아 있는 시간조차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말이라 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붐볐다. 그러나 급한 일정이 없는 날의 운전은 오히려 여유로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하루의 짧은 여행이 끝났지만 마음속에는 잔잔한 여운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오늘 하루 자연의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하루였다. 어쩌면 행복이란 거창한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하루 속에서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종사의 고요와 다산의 정신, 그리고 가족과 함께한 하루의 시간이 마음속에서 잔잔히 겹쳐지며 오래 기억에 남을 주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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