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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무엇일까?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여정

by 나무나비

교회에서는 영접기도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내 모든 죄가 해결되고 바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죽어도 천국에 간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제까지 교회에서 배워왔던 '복음'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초등학교 때 교회를 다니면서 어렴풋이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사로 중학교 때에 다니지 않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세례를 받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으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깨달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능보는 날 신비한 체험까지 하게 되었다. 대학교 때에는 선교회까지 들어가서 대학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만나 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자들이 쓴 책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랜 방황 끝에 수능 날보다도 더 강한 체험을 하면서 나는 돌아왔고 나는 절대 이 종교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체험 때문은 아니었다. 이 종교에는 그보다도 더 강력한, 일상의 '동행'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 나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것에 감사하고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모든 삶을 그분에게 복종하지는 못하지만 기도 중에 깨닫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그분의 뜻에 맞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나는 그분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누구는 이것을 세뇌라고 하고 누구는 이것을 병에 걸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다. 나는 그분이 내 삶에 깊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 모든 삶을 궁금해하시며 내가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삶으로 내가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안다.


여기까지 보면 나는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이다. 하지만 실상 나는 최근에 이 종교의 문제로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다. 다시 하나님을 부인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를 밤낮 고민했다. 그것은 내가 바로 저 첫 단락에서 이야기한,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의 정의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물론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다. 그러나, 과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할 때 내 머리는 뱅뱅 돌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부활도 믿고 기적도 믿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는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천국이며 세상 끝에 올 천년왕국은 믿어지지가 않는다. 뭐랄까, 되게 막연한 느낌이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내가 이 몸으로 막 빛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떨어지는 것인가? 그게 가능해?' '이 세상 끝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나서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고? 그러면 지구는? 태양에게 먹혀버릴 지구는 그 세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고개를 내젓게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세상 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함이 들 때마다 로마서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그래,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도 이긴다 했으니 죽어도 나를 지켜 주시겠지.' 하고 아주 막연히 생각을 할 뿐이다. 이런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인가?


여기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과 부활과 존재의 비밀, 그리고 천국과 지옥 그 모든 것을 다 믿는다. 성경에 나온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믿는 사람인데, 그걸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방탕하게 산다. 그저 돈을 벌 궁리만 하면서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 제 배를 채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없이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그래도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보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저 위에 말한, 교회에서 전파하는 저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람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는 저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의 멱살을 잡고 소리칠 것이다. '니가 나한테 분명 말했잖아.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그런데 내가 왜 지금 이 꼴인데!' 이 사람처럼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저 위의 말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당신은 천국에 갑니다.'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이제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도 삶으로 증명되지 못하면 당신은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에서 전도축제 날에 복음을 이렇게 전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천국 지옥은 물론이고 기적이며 부활이며 단 하나도 믿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반하는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남을 돕는 것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타인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죽으면 지옥에 간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말이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돕는 이들을 보고 '이 사람들은 나를 돕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을 비록 몰라도 선하게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실 것인가? 단지 이 사람이 지나치게 합리적인 이성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이야기했지만, 실은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믿음을 어디까지 한정하느냐 하는 것부터가 머리가 아픈 일이다. 성경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정말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믿어야 그것을 믿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하나도 믿지 못하면서도 성경을 너무 좋아해서 늘 읽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믿음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처럼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성경 학자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불신으로 보아야 하나. 그렇다면 믿음은 그냥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국한되는가.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과연 어디까지를 믿음의 범위로 두어야 할까.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에 백프로 순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딱 50퍼센트까지의 순종을 기준으로 두고 그 이상은 천국, 그 이하는 지옥일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너무도 묘한 말이다. 믿음에 근거할 때 솔직히 누가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위에 말한 것처럼 실천 영역을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고 사실을 믿는다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히 사람이, '예수님 믿었으니 나 구원 받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을 왜 교회에서는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인가. 그 부분이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감히 함부로, 구원을 마치 면죄부인양 팔아댈 수 있을까. 그것이 교회의 역할인가.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나는 물론 매우 부족하다. 자주 회개를 하고 내가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고 나서 돌이키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또 하나님을 붙들고 도우심을 찾게 된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다. 그럴 때에, 성령이 불처럼 임하면서 나를 뒤집거나 하는 등의 대단한 '역사'가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밀한 돌보심을 느낀다. 나에게 임했던 몇 번의 기적이 있지만 오늘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것때문이 아니다. 지금 현재도 그분이 나와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혼란 속에 있는 나를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을 믿는다. 하여, 나는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이 교제가 어떻게든 이어질 것을 믿는 것이다.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가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쩌면 이것을 '천국이 너희 안에 임하였다'고 표현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믿지 않으나 믿는 자처럼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꼭 명시적인 '예수'라는 이름으로 천국과 지옥을 판가름하실까. 나는 어쩐지 이것이, 2000년 전 유대 사회의 바리새파와 같은 시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믿었던 그들, 거룩과 부정한 것을 엄격히 구분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던 그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쳤고, 배가 고플 때에 제자들이 밀을 까먹는 것을 나무라지 않고 옹호해 주셨다. 어떤 법과 제도, 지켜야 할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선과 사랑을 말씀하셨다. 그런 분이, 자신의 이름에 그토록 얽매여서 '너는 착하게 살았으나 내 이름을 몰랐으니 죄인이로구나!'라고 말씀하실까? 어쩌면 '너는 내 이름을 명시적으로 몰랐지만 내가 사랑한 땅, 내가 창조한 이들을 그토록 아꼈으니 이것은 곧 나를 아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물론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누구를 구원하실지는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팔아 교인을 늘리고, 교회를 채워가는 것은 면죄부를 팔아 교회를 지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으니,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예수님 앞에 아뢰고 그분을 주인으로 섬겼을 때 우리 안에 참된 천국이 임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지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몫이죠. 저는 잘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분명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복음을 잘못 아는 것이다.' '당신은 믿음이 없다.' '당신은 잘못된 믿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면 잘된 믿음은 무엇인가? 성경 역시 하나의 진리를 전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복음서마다 나오는 말도 조금씩 다르다. 예수의 말과 바울의 말이 다르다고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구약과 신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저 가장 위에 있는 교회에서 '진리'라고 전하는 저 말이 요약한다고? 그 말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의 기초에는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교회에서 전해진 말'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이 말을 믿지 않으면 당신은 교인이 아니다'라는 배척에 대한 두려움에 싸인 채 나의 마음에 깊이 자리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떨치기가 그토록 두려웠었다. 나 또한 배척이 되리라는 두려움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유대교를 배신한 사람은 예수님이었다. 그러나 실은 예수님은 유대교의 본질을 더 깊이 들어가서 부패를 바로잡고 경직된 것을 고쳐서 회복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결국 유대교에서 배척이 되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두려움을 이길 때 새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만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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