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셨을까.
그는 저를 때리는 자의 죄를 직접 사하지 않았다.
잘 지내다가 틀어진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고 나중에는 분노했다. 상대의 미성숙한 태도에 몹시 실망한 나는 만나는 사람들(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흉을 보고 다녔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글도 쓰고, 심리학 관련 유투브 채널을 보면서 화를 삭였다. 내가 보는 내용은 대개 '나르시시스트' 관련 내용이었는데, 그의 행동이 아무리 봐도 나르시시스트 같아서였다. 나는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악인에 대한 책을 빌려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안했다.
당시 나는 꾸준히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단순히 그런 행위만을 할 뿐만이 아니라, 내가 죄라고 생각했던 것을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다짐이야 수차례 했지만, 그때는 무언가 달랐다. 죄를 멀리하려고 노력하면서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러자 정말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배 시간에 계속 눈물이 났고 심지어 설교 후 기도 시간에는 무언가가 슥 내 앞으로 오는 생생한 느낌까지 받았다. 오래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기분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지인과의 일로 심히 마음이 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며 매일 매달리듯이 기도했다. 그를 변화시켜서 잘 화해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사과를 주고 받았음에도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냉랭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냐고 하는 기도에 응답은 놀랍게도 '그냥 가만히 있어라'였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읽는 모든 성경에서, 모든 설교에서, 같은 메시지를 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분별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이들(그를 모르는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답을 구했다. 그런데 그들의 답도 하나같이 '가만히 있어라'였다.
나는 진심으로 하소연했다. 정말 가만히 있기 너무힘들다고. 오늘 나에게 하는 것 보시지 않았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글거리면서 인사하는 내 앞에서는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고. 그럴 때마다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못난 인간이라서 너무 괴롭다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다가 문득, 놀랍게도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상처 입히는 그와 비슷한 모습을 나도 누군가에게 그대로 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바로 나의 남편에게였다. 당시의 나는, 결혼이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선택이라고 굳게 믿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남편 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공공연하게 당신을 미워한다고, 이혼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인 줄도 알지 못했다.
내가 당해 보니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게 괴로운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내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결혼을 깨려고도 하지 않고,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최선을 알아주지 못했다. 내 앞에서 그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모자란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그렇게 취급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못했다. 그는 나를 여왕처럼 섬겨야 하고, 나는 그를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그런 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정말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회개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남편이라고 함부로 대했던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빌었다. 그후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이 나던 집에 잔잔하게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렇다고 한순간에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싸움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기는 했다. 남편도 내 변화를 감지하고 놀라워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했지만 나는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우리집에 예수님이 오셨어. 나는 그렇게밖에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상황을 알게 된 남편은 나를 미워하는 그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했다.
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자주 고성을 지르거나 친구들에게 나쁜 말을 해서 원장 선생님의 호출까지 받았었는데, 그 아이도 점점 변해갔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남에게 양보를 했다. 집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짜증을 내고 울던 버릇이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심리학 책을 보면서, 점점 그의 모습이 아닌 내 내면을 두드리는 책을 찾다가 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했다. 남편은 회개 직후에는 정말로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다가 지금은 좋은 면도 나쁜 면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남편의 말에 화가 나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고성을 지르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어느덧 나를 꽤나 힘들게 했던 그와 틀어진 지 1년 정도가 지났다. 나는 그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단둘이는 아니고, 모임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약속 장소에 갔고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웃으며 인사하자 그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더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오랜만이었지만 잘 지냈느냐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에게 질문을 던져서 그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이전에 수차례 질문을 던졌고, 쌀쌀맞은 대답에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미워하진 않지만, 그 역시 나를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사 나누는 정도로 그렇게 충분했다.
그와의 교제는 그것이 다 였다. 만나서 인사했고, 갈 때 인사했다. 갈 때는 여럿이서 인사를 해서 더욱이 그는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갔다. 그거야, 여럿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가 곁을 지날 때는 심장이 두근거리긴 했으나, 그를 좋아했으니 사랑받고 싶었을 거라고, 그래서 지금 이런 걸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니 그렇게 심하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날 집에 돌아왔는데, 무언가 고요한 평온이 내 마음에 가만히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대체 뭘까. 침대에 누워서 먹먹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떠올랐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에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 그들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는 이 부분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고통 속에서도 그런 기도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찡한 감동을 준다. 그 부분을 나는 물론, 교회에서 배웠듯이 자신에게 고통 주는 이들마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을 직접 실천하신 거라고. 그런데 그날 자다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죄를 직접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인데, 왜 자신을 놀리고 때리는 로마 군병들의 죄는 직접 사하지 않으신 거지?'
예수님은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는 앞에서도 병자들의 죄를 사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죄인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신다. 그런데 그분이 돌연 자신을 괴롭히고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며 주권을 하나님께 넘기는 것이다. 아무래도 스스로 그런 사람을 용서하기는 힘드셨을까? 그래서 직접 하지 못하시고 하나님께 대신 맡겨드린 것일까? 하지만 그런 마음이라면 스스로 몸을 십자가로 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문득 내가 지난 1년여동안의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나는 나에게 죄를 지은 이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나는 그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대신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가정이 화목해지는 것을 경험했으며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문득 나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처럼,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아, 하나님의 용서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타인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그 타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타인의 죄를 통해 네 죄를 보고, 그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통해서도 잘 나와 있다.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제게 조금의 빚을 진 이를 용서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그 탕감마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는 비유이다. 즉 우리가 남의 죄를 탕감해야 하는 이유는, 남 앞에서 굴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핍박받으시는 중에 했던 기도 역시,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예수 자신은 그들을 용서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즉 그들을 벌 주시고 상 주실 수 있는 주권자께서도 용서를 하실지는 의문으로 남겨 두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가 다른 병자들을 치유할 때 하셨듯이 그들이 용서받았음을 선언하고자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굳이 이 말씀은 왜 하셨을까. 내 생각에는, 예수의 제자인 우리에게 그 같은 모습을 모범으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실까 생각한다. 예수께서 끝끝내 걱정하신 것은 자신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들에는 단순히 열두 제자를 포함한 당대의 제자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생겨나는 수천 수만 수억의 후대의 제자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제자들 역시 예수를 따라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럴 때에, 예수께서는 고통을 주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또 그 일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지 친히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나 같은 경우는, 내게 고통 주는 이에 대해서 기도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마음을 가져가기로 결단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보여주시고 회개하게 하셨다. 주기도문에서처럼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나를 용서하여 주신'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하는 지도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주셨다.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제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에게 고통 주는 자가 아닌 내게 적용이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에게 더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며, 그 관계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이시고 대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향하게 하시고 그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의 내면을 튼튼하게 세우도록 격려하셨다. 그와의 관계에는 해결된 것이 없으나 나는 확실히 회복되었다. 용서는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전에 그랬듯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예전에는 그럴 때에, 그가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 중에 내가 없는 것이 슬펐다. 전에는 나 역시 그와 정답게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았는데 더는 그럴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 자꾸만 내 탓 같고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을 봐도 크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중요했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에 대해서는, 관심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전처럼 온 정신이 그에게 향해 있지도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더는 그를 미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저 그도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고,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고 몇몇 사람은 그 상처가 치명적이었을지도 모르니, 나 역시 크게 다른 점이 없지 않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