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C.S루이스와 장성호 감독과 나
예수님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있다. 이 소설을 기획한 것은 작년 4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성금요일에 홀로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시청하고 나서였다. 그 영화를 굳이 금액을 지불하고 그날 본 것은, 교회 셀모임에서 나눴던 말들 때문이었다. 셀모임에서 나는 오래 고민하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하잖아요. 차라리 사약 같은 거로 간단히 하면 좋았을 텐데요."
만약에 그러하다면, 나는 기꺼이 사약 그릇 팬던트를 목걸이에 달고 다닐 의향이 있었다. 교회 지붕 위에는 십자가가 아닌 사약 그릇이 놓였을 것이요, 교회 장식으로도 사약 그릇이 이곳저곳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자, 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은 잠시 굳었다. 이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지, 라는 고민이 두 사람의 눈에 스쳤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패션오브크라이스트'를 보았을 때 그 답을 얻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했다.
집에 와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내가 20년 전에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했던 영화였는데 그 끔찍한 영화를 나는 영화가 가장 잘 보이는 좌석에서 보아야 했고 보면서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인지 고문을 받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 영화도 아닌데 영화관에서 눈을 감은 것은 처음이었다. 누구는 울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잔인하고 끔찍하기만 했던 그 영화를 다시 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 내가 바뀐 것인지(영화가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작은 화면으로 보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모든 장면에서 눈을 감지 않았고 때때로 끔찍함에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어도 보고 나서는 감사함과 은혜를 깨달았다. 그것은 그 모든 고통을, 그가 왜 짊어졌는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서 대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장면도 아니요,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같이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도 아니었다. 내게 마음에 남는 것은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끊임없이 킬킬거리는 로마 병사였다. 그들은 전혀 재밌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키들거리면서 채찍질을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저게 뭐가 재밌다고 저러는 걸까 생각하다가 문득, 저들이 아침은 먹고 왔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저들은 무슨 아침을 먹었을까. 캘로그에서 나온 콘푸로스트는 아닐 건데, 뭘 먹고 왔길래 저런 일을 하면서 킬킬댈 수 있을까.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 사람들, 그 킬킬거렸던 로마 군인을 포함한 그들의 이야기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했던 것. 그걸 생각만 했어야 했는데 이 미련한 자가 기도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잊고 살았는데 그게 올해 갑자기 생각이 났다. 기도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라는 생각이 뒤늦게 났다. 왜 책임지지도 못할 기도를 해서. 마침 출간했던 웹소설이 줄줄이 폭망하고 더는 계약도 안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시켜서, 혹은 누군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롯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글에 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길 때였다. 나는 다시 그 로마 군인을 떠올렸다.
자료를 수집하고 읽으면서 나는 천천히 준비를 해 나갔다. 예수 이름이 나오는 것은 가리지 않고 읽다 보니, 다양한 견해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 책에서, 예수님의 목적은 따로 있었는데 바울이 '자신만의' 기독교를 만들어서 그것을 오늘날까지 믿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 책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료와 함께 설명했고, 읽으면서 나는 그의 사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정말 그랬나,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실은 바울교였단 말인가. 우리가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라 로마에서 처형당한 바울이었나.
이 사상은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내가 믿고 있던 예수님의 사상, 십자가에 달려 나 대신 돌아가셨다는 그 대속 사상이 예수님이 아닌 바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복음서는 이 사상이 나온 후에 편집된 것이라 십자가와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사상 가운데에서 다시 쓰여진 것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진짜'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그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의 곁에 있는 신의 성품이라고 했다.
나는 혼란 가운데에서 계속 복음서를 읽으면서 또 책도 찾고 기도도 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누가, '대체 진짜 말씀은 무엇일까요' 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예수님의 진짜 말씀, 어떤 오리지널이 있다는 것, 그것 역시 환상이 아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제야 내 생각이 트이면서 예수님의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태복음 13장 3-4절)
이것은 주일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대개 알고 있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 비유의 교훈은, '씨를 잘 뿌려야 한다'가 아니다.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태복음 13장 19절)
씨는 곧 천국 말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고 땅은 마음이다. 그러니 씨를 뿌린다는 것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씨가 잘 자라서 결실을 맺든지 아니면 누가 쪼아먹거나 해서 사라지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나는 왜 이 말씀을 떠올렸는가. 그것은 씨가 천국 말씀이고 땅이 마음이라면, 씨가 마음에 아예 심기지 않으면 그 씨는 싹을 틔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말씀이든 마음에 닿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내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바울은 그 씨를 틔우려고 평생을 헌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싹틔운 대로 말씀을 전했다. 바울은 배움이 많은 사람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초특급 엘리트에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해석할 줄 안다. 하지만 해석이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물론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겠지만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있으면서 자신의 말씀을 교회에 나누고 소통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씨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예수는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서 지금도 함께 이곳에 있는 존재이다. 심지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예수님은 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과 늘 함께하신다. 바울과도 마찬가지였다. 다메섹 길에서 만난 이후, 예수님은 바울과 깊이 교제하면서 아주 많은 말들을 나누었을 것이고 그것은 바울의 편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바울만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그후 수많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정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이론을 이야기한 사람이다. C.S루이스 역시 다양한 저서를 통해 기독교를 설명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킹오브킹스>감독 장성호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자신이 해석한 예수님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작업에 동참하는 중이다.
같은 씨앗이라도, 밭이 다를 때 그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밭들이 하는 역할은 씨를 잘 틔워내어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점검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그 다름을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따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모습인데, 저 사람이 만난 예수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과한 각자의 예수님을 증거할 뿐이다. 감동을 주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사실을 믿으시오' 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의 삶을 통과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다른 이의 삶에서도 울림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성경 외에도 신학 서적 등을 읽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나라는 땅은 씨앗을 틔워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나만의 체험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창작하는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 창작물을 통해, 그 창작자에게 끊임없이 상관하신다. 이것은 '내 이야기를 쓴다고 했으면 제대로 잘 써야지 않니' 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자의 작품보다, 창작자의 삶에 더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난 이걸 왜 시작을 했던 건지,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그럼에도 '땅과 씨앗'이라는 이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어서 이 밤에 소설도 안 써지는 김에 한 번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