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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오브킹스>

리뷰 및 후기

by 나무나비


예수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와중에 예수님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대히트를 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왜?'였다. 몇개월간 사투를 벌이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세상 가장 까다로운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1.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다 알려져 있다.


2. 하지만 대사를 크게 변형하거나 의외의 모습으로 창작할 수는 없다.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렇다고 알고 있는 에피소드를 그대로 두면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내가 전에 쓴 글에서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 쓰기가 참 힘들다고 했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남자 주인공은 양반이다. 그래도 대사를 창작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대사를 순수 창작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 작품 속의 예수님은 혼자 '종이' 같아진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다른 캐릭터는 다 살아서 이 말 저 말 하며 훨훨 뛰는데 예수님만 성경 속의 말만을 하면서 혼자 2차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도 솔직히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흥행을 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내용에 대한 큰 논란도 없는 것을 보면 거의 성경 그대로 창작을 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것이 흥행이 가능할까. 궁금해서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안 오는데 한국에서는 7월에 개봉을 한단다. 어떻게 기다리나. 나는 휴대폰 달력에 표시를 하고 손꼽아 개봉날을 기다렸다. 미국의 흥행에 힘입어였을까. 개봉이 일주일 앞당겨졌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기뻤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오늘을 위해서 어제는 일찍 자려고 했으나 잠이 안 왔다. 겨우 잠들었더니 새벽에 눈이 떠졌다. 누가 보면 진짜 예수님 오시나 했을 것이다. 홍광호 뮤지컬도 이렇게 안 기다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지성이를 학교에 보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감고(머리가 어느새 떡이 져서 애니메이션 볼 때 계속 간지러울 것 같았다) 지하철역으로 갔다.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갔는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다. 상영관에도 에어컨이 안 나오는 거 아닌가 싶어서 팝콘 사면서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다행히 상영관에는 나온다고 했다. 들어갔는데 영화 시작 시간인 10시 30분이 되어도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여기 6관 맞죠?" 같은 관객에게 묻고 나서 돌아서니 화면이 켜졌다.


은전 한닢을 원했던 이의 바람이 이러했을까. 기대하다 못해 잠까지 설치고 온 나는 두근대며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지성이 같은 애가 나왔다. 큰 스토리는 찰스 디킨스(크리스마스 캐롤 쓴 작가)가 아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지성이 같은 애는 예수님은 모르고 아서왕만 알아서 아버지 일터에서 혼자 칼을 들고 설치다가 아버지께 혼이 난다. 예수님이 아니라 오은영 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에 아버지는 왕 중의 왕이 있다며 예수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한 중반까지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구성도 화려하고 연출도 멋진데 문제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꼭 스포를 끝까지 알게 된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내용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게 저작권 허락은 받은 것인가 생각하면서 나는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어제 괜히 긴장했다고, 그냥 어린이들이나 보는 애니메이션인데 내가 뭘 기대한 거냐고. 생각하면서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화장실까지 가고 싶어졌다. 예수님은 붙잡히고 십자가에 달리는데 화장실 어떡하지 생각에 집중도가 점점 떨어졌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모든 기대를 잃어버리고 끝나면 얼른 화장실에나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화장실만이 내 구원이라며 원망스럽게 음료수를 노려보던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이제 부활하면 끝이야, 라고 생각하던 그때 화면이 바뀌면서 처음 장면부터 나왔다.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기적들이, 이제는 내가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님을 보는 연출로 바뀌어 반복되었다.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이게 뭘까. 왜 이걸 다시 보여줄까. 그리고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의 장면이 나왔다. 나는 베드로가 되어 물 위의 예수님을 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나를 잡아당겼고, 물 위로 솟아오르는 나를 보며 물에 잠기셨다. 그리고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것은 감독이 해석한 기적이었다. 이 기적들은 모두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당신을 살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사 한 줄 없는 연출이었다. 어찌보면 유치할 수도 있는 연출이었다. 그러나 기대 수준이 이미 바닥이었고, 화장실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난 화려한 볼 것을 원했지, 관객들을 어떻게든 끌어당기는 장치를 원했어, 무언가 새롭고 재밌는 것을 바랐지. 하지만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잠시 멍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익히 알고 있는 찬송가가 나왔다. 영어라서 가사는 잘 모르겠지만 음은 익숙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계속 멍했다. 울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오전에 바빠서 성경만 읽고 기도는 하지 못했기에, 점심을 먹고 나서 기도를 했다. 아무 슬플 일이 없는데 눈물이 났다. 엉엉 울었다. 엉엉 울면서 나 왜 이래요 하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웹소설을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법, 인기가 있는 법을 알아서 다른 이들보다 잘난 웹소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창작의 목적이었다. 예수님 이야기를 쓰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유명한 분이시니, 잘만 되면 대박이 나리라, 적어도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이야기는 한 번 해주시리라, 어쩌면 여기저기 불려다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저절로 붙어서 꼭 꼬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를 얻어서 무엇할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서 무엇할까. 그게 나에게 뭔데. 그게 내 성장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는가. 그것은 그들이 보는 것이다. 그들의 눈은 그들의 눈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눈은 결국 질투로 바뀐다. '킹오브킹스'도 벌써 여기저기서 모함하는 말들이 들린다. 잘되는 이들에게는 늘 적들이 따라붙는다. 나 역시 잘 되었을 때 가장 욕을 많이 먹었고, 한때는 댓글조차 보지 못하고 댓글을 피해 다녔다. 더 큰 영광 뒤에는 더 큰 상처가 있다.


질투나 욕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우러름은 결국 사람을 망가뜨린다. 성장하지 못한 이가 다른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럴 때 더 큰 욕심을 키우고, 더 잘 되고 싶어하고, 잘 안 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망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연예인들이 괜히 알콜 중독에 빠지고 마약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에 빠지는 것은 그만큼 삶이 괴롭기 때문이다.


감독이 <킹오브킹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내게 온 의미는 이러했다. 나는 너를 살리고 나를 죽였다. 네가 그만큼 귀해서 내 십자가도 기쁘게 졌다. 하지만 너는 그것보다, 네가 얻게 될 영광이 더 큰가. 너를 바라고 너처럼 되고 싶어하고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더 좋은가. 너는 내 이야기마저도, 그런 욕심 때문에 쓰는 것인가.


나는 가장 흉한 나를 보았고, 가장 거룩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받은 사랑은, 사람들의 그 일시적인 애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애정은 어차피 바뀔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애정은 순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나는 와르르 부셔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 위에 서 있다. 무너지지 않을 반석 위에 서 있다. 그 사랑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어느 영광보다도 더 크다.


<킹오브킹스> 감독이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보았다. 애니메이션을 보기 전에는 스포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뭐랄까, 담담했다. 인기를 얻든 얻지 않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가, 이미 누린 것이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어느 것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감독의 의도를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모든 기대를 다 버렸을 때 일어났던 그 기적 같은 순간. 그리고 우리를 살게 했던 그 깊은 사랑.


킹오브킹스는 왕중의왕이라는 뜻이다. 아서왕보다 더 큰, 우리가 아는 왕들보다도 가장 큰 왕.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내가 왕처럼 섬기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큰 왕이며 사랑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아마도 나를 사랑하는 그분은 그런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었을 거라고. 이 바보 같은 나는 영화관을 나와 집에 와서도 한참이 있어서야 그 의미를 겨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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