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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

김영숙 작가 에세이

by 나무나비


아무도 모르게 추락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아이도 건강하게 잘 크고, 남편도 직장 생활을 잘 하고 있고, 나도 특별히 아픈 데 없이 살면서, 또 웹소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잘 나가지는 않더라도 계속 출판사와 계약을 해 가면서 작품 집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나는 공허해졌다. 작품의 결과가 기대만큼 잘 나오지 않아서였는지,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아서였는지, 남편과의 관계가 삐걱대서였는지 아니면 그 모든 이유였는지.


마침 누군가 글쓰기 수업을 열었고, 적당한 시기와 비용이라고 생각해서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쓰는 글과는 전혀 다른 에세이 수업이었다. 에세이라니. 웹소설 작가에게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웹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가더라도 손 씻으러 간다) 당연히 방귀도 뀌지 않는다. 김치를 먹다가 이에 고춧가루가 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웹소설이란, 그중에서도 내가 쓰는 로맨스란 남자 주인공을 최대한 예쁘게 포장해서 전시해야 한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냐'며, 있는 뻥과 없는 뻥을 다 쳐가며 잘 팔려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런 걸 써야 하는 내가 에세이라니.


어떤 충동에 에세이 수업을 들었고, 그것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주로 내가 듣는 평은, 잘 읽힌다, 재미있다는 평과 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다, 하나마나한 말을 써 놓았다 등등이었다. 그저 듣기에 좋은 말을 쓰는 훈련을 해오다 보니, 내 진심에 닿아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어떤 싯귀처럼 내가 쓰는 글들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었고, 그저 보기에나 그럴듯한 글들이었다.


어쩌면 내 삶도 그러했는지 모르겠다. 언니와 오빠 그리고 나. 일곱 살 터울의 언니와 네 살 터울의 오빠는 자주 다투었고, 아빠는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뜨지 않았다. 그 속에서 고생하는 엄마에게 나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예뻐했으나,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네가 그래도 내 희망이다'라는 말은 내게 족쇄가 되었다. 나는 있는 듯 없는 아이가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웃음 속에 감추는 것이 더 익숙했다. 존재 속의 무존재. 껍데기만 있는 삶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쌓여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벽은 너무 높았고, 통속적인 웹소설은 그나마 쓰기 쉬울 듯했다. 웹소설 작가가 되었고, 이제야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출판사와 계약도 했고, 좋은 성과들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내게 '보이지 않는 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평가하는 눈, 내가 잘해내야 한다고 말하는 눈, 나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눈이었다.


껍데기로 사는 데 익숙했던 나는, 결국 웹소설 작가가 되어서도 껍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썼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잃어갔다. 답답했고 갑갑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내가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에세이를 쓰면서, 비로소 그 잃어버린 것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내 삶,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오로지 '내 것'들.


<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는 25년차 방송작가인 김영숙 작가가 쓴 첫 에세이집이다. 나는 김영숙 작가와 에세이 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같이 모임을 하면서는 과연 직업 작가답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었다. 질투도 났었던 것 같다. 그러던 그가 책을 출간했다고 했을 때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구나 생각했다. 집에 책이 너무 많았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샀다. 북토크를 두 번이나 참여하게 되었는데 두 번 다 책을 안 읽고 갈 수는 없어서 두 번째는 읽었다. 그저 잘 썼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읽던 도중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눈들 속에서 괴로워했던 날들, 내 자신을 잃고 살아왔던 공허한 순간들, 후회할 일도 아닌데 후회하고 자책하고 부끄러워했던 나의 지난 날들을 김영숙 작가도 고스란히 겪어내고 있었다. 그저 주변에 나를 맞추기 위해서 나를 비워내고, 그러다 결국 나 자신도 내가 누군지 모르던 때에 내가 에세이를 만났던 것처럼, 김영숙 작가 역시 제 자신을 찾아가며 그것을 글로 계속 써내고 있었다. 자신 위에 켜켜이 쌓여 있던, 처음에는 먼지였겠지만 지금은 단단한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을 글이라는 드릴로 뚫어내어 결국은 그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용기가 너무 고마워서, 나는 아직 못하고 있는 그 일을 먼저 해낸 그 모습이 너무나도 대단해서, 어느 순간 눈물이 났다. 난 아직도 숨어있는 내가 두려운데. 뭐가 나올지 몰라서 아찔한데. 김영숙 작가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그 일을 참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해내주었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예쁘장한 표지의 작은 책이지만 이 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숱한 밤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 혹은 꿈에서라도 아파했을까. 그리고 다 쓰고 났을 때 얼마나 후련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또다시 질투가 났다. 그것은 단순히 글을 잘 써서 나는 질투가 아니라, 먼저 길을 간 사람에 대한 질투이다. 어차피 방학 숙제는 똑같이 해야 하는데, 나는 개학 전날까지 못 하고 끙끙대는데 이미 다 했다며 놀러온 친구에 대한 질투랄까.


글쓰기 모임 합평 때처럼 매끄럽게 잘 쓰인 글이지만, 그때보다 훨씬 내면의 힘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글은 작가가 글을 쓰면서 글과 함께 성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김영숙 작가는 '내가 뭐라고' 책을 내나 했다지만 나는 김영숙 작가라서 오로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 주제에 맞지 않아 쓰지 못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음 책에서 꼭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그 다음 책이 나올 때쯤에는 나도 지금보다 더 나에 대한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다. 꼭 에세이 작가로 출간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내 목소리를 더 진하게 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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