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쌍둥이인 미지와 미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등장하는 것은 대개 몸을 바꾸게 하기 위함이다. 원래는 A가 결혼을 하거나 회사를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쌍둥이인 B가 대신 결혼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함으로써 벌어지는 상황들, 그 상황 속의 긴장이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지의 서울은 그다지 독특한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에서 곤경에 처한 미래 대신에 미지가 회사에 다니게 된다. 큰 줄거리는 그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감동하고 좋아했던 까닭은 쌍둥이가 나와서가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서울, 은 하나의 모험을 건다. 보통은, 이야기 속에서 미래 대신에 미지가 회사에 들어갔다고 하면 '이제 회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미래 대신에 미지가 뭔가를 해내겠구나, 그것이 미래까지도 바꾸겠구나'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것이 많은 작품에서 보였던 클리셰이다. 그렇지만 미지의 서울은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나가지 않는다. 미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미래가 하지 못했던 여러 관계들을 만들어 가지만, 그것은 상황을 완전히 역전할만한 대단한 돌파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미지가 다 해결해 놓은 곳에 미래가 숟가락 하나만을 얹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보통 쌍둥이 주인공이 나오면, 둘 중 하나는 바보이거나 죄인이 된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그 바보나 죄인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처리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를 욕하면서 대리만족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은 그런 간편한 방식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게 돌아간다. 미지와 미래, 둘 모두를 존중하는 것이다. 미지는 미지 나름의 이유가, 미래 또한 미래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둘 다 버티고 있는 삶이 있다. 그래서 미래의 문제는 미지가 해결을 해줄 수 없다. 해결의 물꼬 정도는 터줄 수 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래가 된다.
미지와 미래만 주인공이 아니다. 미지와 결국 사귀게 되는 호수, 그리고 호수의 어머니와 미지 미래의 어머니, 그리고 미지 미래의 할머니, 미지인 줄 알았던 미래가 일한 딸기밭 주인, 그리고 미지가 회사 일때문에 만났지만 결국은 평생 인연으로 이어진 닭내장탕 할머니(이렇게 말하는 건 그녀의 이름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닭내장탕이 정체성이어서가 아니다)까지. 모두가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되고, 모두가 그래서 성장한다. 그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그려진 캐릭터가 없어서 그럴까(물론 미래를 괴롭힌 악역들이 있긴 하나 그들은 번외로 치고) 드라마는 천천히 가고 때로는 멈춰 있으나 그럼에도 깊은 공감을 준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미지와 미래의 어머니다. 보통 이런 드라마나 소설 등의 대중적인 이야기 속의 어머니는 선인이거나 악인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자식에게 끝없이 퍼주는, 그래서 정말이지 '모성'의 끝판왕같은 어머니가 있고 과연 친모인가 싶을 만큼 이해가 안 가는 어머니가 있다. 하지만 둘 다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도, 왜 어머니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그릴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회사원이었다면, 친구였다면, 동네 꼬마였다면, 아주 착하거나 아주 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그릴까. 왜 어머니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인가. 어머니는 중간이 없나. 그런 고민을 했던 것은, 내가 바로 그 '어중간한' 어머니이고, 또 생각해 보면 '어중간한' 어머니를 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지와 미래의 어머니는, 어떤 면에서는 자식을 차별하는 어머니이다. 미지가 할머니 간병하면서 하는 고생을 알아주지도 않고 제가 할 몫도 미지에게 떠맡기고, 또 서울에서 일하는 미래는 걱정하면서도 미지에게는 그런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가 미지를 차별했던 것은, 자신과 닮은 그녀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미래는 알아서 잘 하리라 여겼지만 미지는 발을 다치고 육상 선수를 그만 둔 후부터 3년 동안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았었다. 그런 미지가 평생을 일정한 직업도 없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푼돈 받으며 일하는 저처럼 될까 두려워서 더 다그치고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내면은 시시각각으로 드러나며 결국은 그녀도 성장하게 되는 서사가 좋았다. 어머니도 어중간할 수 있고, 어머니도 성장할 수 있고, 어머니도 자식 앞에서 엉엉 울 수 있다고 위로해 주는 이야기 같았다.
실은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언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뒤집고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잘 안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 잘 안다, 어떤 도시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하는 것들이... 실상이 그러한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실은 잘 모른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어머니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과연 어머니일까. 미지와 미래에 대해서도, 쉽게 가십거리에 오르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얼마나 알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 이야기속의 모든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고, 변화하며, 결국 '미지'의 것이 되는가 보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고 말했을 때에야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