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싫다

잘못해 놓고 위로해 달라고 하면서 고치지 않는 것

by 나무나비

대학에 다닐 때, 교육학과 전공 수업 중에 상담 수업이 있었다. 좋다는 말만 듣고 들어갔는데, 대학원을 갈까 고민이 될 정도로 정말 좋았다. 크게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심리학 이론에 따른 상담 이론들을 공부한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 이론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부부 싸움, 그리고 형제간 싸움이 자주 있는 조마조마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감정을 용납받고 이해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자란 나에게는 상담 이론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간절하게 필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이론은 칼 로저스의 상담 이론이었다. 인간 중심 상담이라는 이름의 그 상담은, 상대를 가르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주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이론이었다. 대척점에 있는 행동주의 상담이 어떤 방법을 통해 동물처럼 사람도 조종을 통해 고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 중심 상담은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로저스를 만난 것이 진실로 내 삶에 답을 만난 것처럼 희열을 느꼈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 보다,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입시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내 사고와 판단이 생기면서 엄마 말에 반박을 하면 '엄마 말이 다 맞아' '어디서 개똥 철학을 들이 밀어'라면서 내 말을 무시해 버렸다. 내 의견뿐만이 아니라,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는 실컷 때리고는 마치 농락하듯이 먹을 것을 잔뜩 사다 주었다. 거기에는 어떤 사과도 위로도 없었다. 엄마 나름의 위로였겠지만 나는 그 넘치도록 쌓여 있는 과자를 보면서 나 스스로 미치도록 싫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용납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대학에 와서야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왜 이렇게 고장나 버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쉽게 불안했고 대인 관계에서 늘 조바심을 냈으며 내가 남을 어떻게 생각할까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들이 나를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면 정말로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교회에서도 맡긴 일을 거절하지 못 하고 모두 맡아서 반주자에 주일 학교 교사에, 성가대 반주에, 기타 등등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런 것을 하고도 나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내가 과연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그래서 난 로저스가 좋았다. 로저스의 이론에 기초한 상담을 다룬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다리가 이상하게 생겼다는 사람이 상담을 왔다. 그는 자기 다리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다가 겨우 꺼냈다. 상담자는 계속 기다려주고, 상대의 말을 반영해 주었다. "다리 안 이상한지 제가 봐줄게요."라고 얘기하기 보다는 "지금 다리 때문에 계속 고민이 되는 군요. 그것을 보여줄까 말까 고민이 되어 불안하군요." 이런 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었다. 내담자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다리를 보여주고 그 외의 자신의 삶도 오픈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보고서도 상담자는 "멀쩡한 데 왜 그래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 다리를 보여주고 나니 멀쩡한지 멀쩡하지 않은지가 궁금하군요."라는 식으로 또 상대의 감정을 반영해 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렇게 내 감정을 누가 읽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저스의 상담 이론이라면, 나의 이 오랜 불안과 근심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당시에 나는 대학에서 기독교 동아리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는 정말 예수님처럼 살겠다 결단을 한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 선배들이 내 감정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내 가족이 못했던 것을 그들이라도 내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내 감정을 읽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정말로, 내 안에서는 점차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후로 20년이 넘게 지났다. 지금은 공감해주는 것,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는, 요즘 아이들이 너무 마음을 읽어주는 것에 빠지다 보니 도리어 예전보다 나약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 친구의 관점이 정답일 리는 없다. 하지만 나도 그 친구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 가족에게 상처를 받고 자란 20년, 그리고 그후에 마음을 읽어주는 중요성을 되새기며 살아온 20년을 비교해 볼 때, 전자가 물론 더 불행하고 힘들었지만 후자라고 마냥 편하고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불행하고 힘든 과거의 감정을 반추하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나 스스로가 과거에 갇혀서 나오지 못한 채로 더 불행해지는 결말을 맞이하기도 했다. 남편과의 언쟁이 있을 때는 내 감정만 위로 받기를 바라다 보니 정작 남편의 입장은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줄 때도 많았다.


여러 모임에서도 비슷한 것을 많이 느낀다. 나의 또래 여자들은, 적어도 내가 속한 모임에서는 어떤 잘못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기 보다는 '다 그래요' '그러면서 사는 거지'라고 공감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잘못을 저지르거나 고쳐야 할 것이 있어도 안주하고 고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분명 내가 보기에는 잘못한 것 같은데, 나 힘들고 괴롭다는 말 한 마디에 그것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위로해주고 덮어주는 경우가 내 주변에도 너무나도 많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통감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위로를 전부로 알고 '그래 다들 그렇게 사니까 됐어, 나는 잘못한 것도 아니네'라는 생각에 자신의 잘못마저 합리화를 해 버린다면 위로야 말로 오히려 해약이 되는 셈이다.


나는 어릴 때 분명 잘못된 훈육을 받았고, 잘못된 분위기 속에서 존재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며 자라야 했다. 하지만 그 해답이 '무조건적인 용납'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러한 용납은 또다른 '잘못 배운 아이'를 낳는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용납을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이용을 하기도 한다.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며, 자신만 옳고 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공감해주는 사람들의 감정을 착취하며 자신이 옳다는 근거를 그 위로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공감이 나름 에너지를 써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을만하니 해주는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위로만 있는 공동체는 이런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결국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된다.


나는 위로를 바랐는데 상대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한 경험들이 몇 차례 있다. 한 번은 같은 어린이집 엄마에게서였다. 그 엄마는 따뜻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을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어떤 모임 자리에서 나는 요리를 했는데 그만 망해버렸다는 이야기를 그 엄마에게 했다. 다른 엄마였다면 그럴 때가 있다고 하면서 공감을 해 줬을 텐데, 그 엄마는 "요리는 하면 늘어요."라면서 나에게 충고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그 엄마는 요리를 매우 잘했으므로, 잘난척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냥 공감을 바랐는데 내 의도를 알지 못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에 노력을 해서 같은 요리에 성공을 하고 난 후, 나는 그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게 되었다.


또 한 번은, 같은 웹소설을 쓰는 작가에게서였다. 전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내 스토리를 들은 작가가 "그렇게 쓰면 안 돼요."라며 나에게 직언을 하기 시작했다. 까닭은 독자들의 성향상 내가 설정한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자기 스토리에 대한 나름 자부심들이 있고, 그렇게 쓰고 싶은 이유가 있으므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내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작가의 말은 무시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한 근거가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밤 늦게까지 스토리를 다 뜯어 고쳐서 그가 지적한 부분들을 다 덜어냈다. 그러고 나서, 그 부분은 독자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어릴 때 용납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라서 무조건적인 용납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계속해서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등의 폭력적 충고는 지양해야 겠지만 충분히 사람이 사람에게 정중하게, 예의바르게, 충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들을 수 있다. 만약 오해가 있거나 불쾌함이 있다면 서로 소통을 하고 조정을 해야지 '나는 어릴 때 용납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말은 받아들일 수 없어!'라면서 마음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반성하고, 성장하고, 또 소통하는 존재이기에 이것이 멈추어 버린다면 그는 겉은 자라도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용기를 내어 충고를 하고 또 충고를 받기도 하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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