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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파파 May 16. 2024

001 정의 중독(나노 노부코 저)

최근 몇 년 사이 예능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며 촬영되었습니다.'

'해당 방송 촬영 후 발생한 쓰레기는 모두 수거하였습니다.'


등등의 자막이다.


공영방송이니 당연히 그러한 사회 규칙의 준수는 당연할 것인데 굳이 자막에 넣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위 프로불편러들 때문이다. 그들은 TV 속에서 발견하는 아주 작은 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의 눈으로 영상을 시청하고, 발견한 작은 흠집을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진다. TV 예능을 보는 이유가 웃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난거리를 찾기 위한 것 같다. 그러한 비난이 얼마나 많으면 방송마다 저런 문구를 넣는 것일까 놀라웠다. 더 나아가 유튜브 영상만 봐도 댓글에 얼마나 많은 지적이 난무하는지, 가끔은 내 도덕심에 의심이 갈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에도 과도한 비난조의 댓글이 달린다.


조선 시대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 가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당파 다툼을 벌인 예송논쟁의 역사를 상기해 보면 불필요한 비난과 비판은 단지 현대의 문제가 아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회생물학적인 기제라고 설명한다.


신체적으로 그다지 강하지 못한 인간은 집단을 구성하여 종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왔다. 그렇기에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만큼 이를 해하는 행위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의 의견에 반하는 배타적 구성원을 비난하고 색출하여 집단의 존속 가능성을 높이고, 그러한 과정의 주도자는 집단 구성원들의 인정을 받아 조직 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집단 내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로 진화되어 왔기에 지적과 비난을 할 때 인간의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인 <사피엔스(2014)>에서 뒷담화가 언어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비난과 욕을 하는 행위가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기에 인간의 본능적 행위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회의 변증법적인 발전 과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마냥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SNS를 위시한 작금의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현상이 과하고 불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넷상에 난무하는 비난들이 정반합의 과정으로 사상의 다양성과 발전을 추동하는 긍정적인 시너지로 작동하기보다, 원초적인 본능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소모적 행태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든다.


일본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도덕 쟁탈전'이라 표현하였고, 이 책의 저자는 제목처럼 '정의 중독'이라 표현하였다. 두 표현 모두 너무나 적절하다. 나의 가치관이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키보드로 전투를 벌이며, 그러한 현상에 중독되어 매일같이 과도한 비난을 이어간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현상이 심해진 것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졌듯 인터넷이 주는 익명성과 신속성 때문이다. 과거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틀렸을 때 초래할 역풍 때문에 비판을 위한 근거를 명확히 하고 더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익명성의 방패뒤에 숨어 아님 말고 식의 지적을 이어간다. 이후 빠르게 돌아오는 피드백 중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내용만 받아들이고 반대의 것은 무시해 버리며 협소한 편견의 장벽을 공고히 한다.   


인간의 '내로남불'적인 성향`타인에 대한 과도한 비난을 부추긴다. 라인홀트 니버 박사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41)>에서 '현대인들 사이에 그들이 자신의 악덕을 점점 더 큰 집단에다 떠맡겨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는 윤리적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점증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즉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의 이유와 책임을 집단에 전가하여 자신은 철저히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기에 타인의 부도덕함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기보다 자동차를 타며 탄소배출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출퇴근 시간대의 지옥철을 개선하지 못한 정부 탓이다. 일회용 플라스틱을 사용해 태평양 쓰레기섬 면적 상승에 일조하는 것은 그러한 일회용품을 만드는 회사 탓이다. 자신의 비윤리적 행위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가 그렇게 내몰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할리웃 배우들의 전용기 사용은 탄소를 마구잡이로 배출하는 환경 파괴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철저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나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하고 타인의 작은 흠을 트집 잡고 욕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정의 중독 현상의 중심에는 세상에 단일 가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는 착각이 있다. 나의 생각이 그 하나의 정답이고 타인의 반대의견은 오답일 뿐이라 치부하는 착각이다. 인간의 유전적, 환경적,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특정 시점과 상황만 고려한 아주 협소한 시각이 불러온 오만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 장 소제목은 '정답이 없으니 생각을 멈추지 말라'이다. 이는 나의 생각과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듯 타인의 그것에도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발언할 기회만큼은 목숨 바쳐 지키겠다'는 볼테르의 명언을 기억해야 한다.(그가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이 문장만큼 볼테르의 톨레랑스의 가치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 다양한 의견과 사상에 대한 수용적 자세를 견지한 비평만이 발전적인 논의를 불러올 것이다. '정의 중독'으로부터의 탈출은 내 생각만이 옳다는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겸손함을 장착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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