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아파트 옆 작은 언덕에 동네 길냥이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하루’, ‘내일’, ‘리틀 타이거’, 그리고 ‘크리스’라 부르는 줄무늬 아이들입니다. ‘블랙 엑스’와 ‘그레이스 그레이’라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루'는 줄무늬 네 아이 중 가장 옅은 갈색톤 옷을 입고 있는 아이입니다. 지족산에 오르거나 동네 슈퍼에 오가는 길에 마주치면, "오늘 하루 어땠어?" 라고 물어보다가 이름이 ‘하루’가 된 아이이지요. 작은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대고 이리저리 흔들며 아이들을 부르면, 살곰 살곰 다가와서 나뭇가지 따라 그 작은 머리를 열심히 돌려 대는 아주 귀여운 아이입니다. 목에 빨간 목줄을 예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태생이 길냥이는 아니었던 같기도 합니다. 그 언덕을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장 열심히 찾아보는 아이가 ‘하루’이기도 하지요.
‘내일’ 이는 말하자면, 개냥이 입니다. 딸아이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같이 노는 아이입니다. ‘하루’에 비해 몸집이 조금 더 크고, 목둘레가 하얀 아이입니다. 뒷목을 긁어주거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면 가르릉 거린다고 하네요. 산책길에 함께 놀다 헤어질 때, "내일 또 보자" 하다가 ‘내일’이가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딸아이와 놀다가 “이제 그만 집에 가자” 하고 돌아섰더니, ‘내일’이가 공원 바로 옆 아파트 담벼락 밑까지 쫄쫄 따라오더군요. 희한하게도 단지 안으로까지 따라오지는 않고, 출입문 저만치에 멈추어 서서 단지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군요. 어두워지는 겨울 저녁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녀석이 짠해서 여러 번 뒤돌아보게 한 아이입니다.
‘블랙 엑스’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까망이 입니다. 일본 고양이 네코상을 떠올리게 하는 귀여운 아이입니다만, 다른 아이들과는 멀찌기 떨어져서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지난 가을, 뒷산에 오르는 길에 한번씩 마주칠 때, 줄무늬 아이들이 이 까망이를 뒤쫓으며 못살게 구는 듯한 모습을 몇 번 보았습니다. 종종 공원의 가지 많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해서, 고양이가 나무도 잘 탄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아이입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온통 까만데 코 주변만 하얀 얼굴을 하고 하얀 장화를 신은 듯한 작은 앞발로 닦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일본 액자 속 고양이가 그대로 현실에 와 있는 듯해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아무튼, 곁을 허락하지 않아 멀찌기서 바라보고만 있는 아이입니다.
‘그레이스 그레이’는 아주 우아한 회색 털 옷을 입은 냥이 입니다. 노숙자 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기품이 넘쳐납니다.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아이인지라, 멀찌기 떨어져서 나무 담장 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데, 가끔씩 우리 앞에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지난 가을, 처음 이 아이를 만났을 때 길냥이가 아니라 잠시 외출 나온 냥이 라고 추측했었답니다. 이 아이도 곁을 주지 않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중입니다.
‘리틀 타이거’는 줄무늬 네 아이 중 덩치가 조금 더 크고, 검은색에 가까운 줄무늬가 좀 더 뚜렷하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줄무늬 아이들끼리 함께 뭉쳐 어울려 다니는 것 같은데, 우리 곁에서는 조금 떨어져서, 왔다리 갔다리 합니다. 우리가 ‘하루’와 ‘내일’이랑 놀고 있으면 마치 감시하듯 바라보고는 해서, 아이들을 잘 지켜주라고 ‘리틀 타이거’라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리틀 타이거’가 어떤 아이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크리스’는 줄무늬 네 아이 중 이름을 못 지어 주어서 익명으로 있던 줄무늬 넘버 포 아이입니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날, 동네 가게에 두부 사러 언덕길을 내려 가는데, 줄무늬 아이들이 나무 아래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별 생각없이 "그래, 너는 ‘크리스’ 라고 하자“ 라고 이름을 슬쩍 던져 주었습니다. 문득, ‘크리스’에게 조금 미안해지네요. 아무튼, 사람인 제가 보기에, 네 아이 중 개성이 좀 덜 드러나는 아이이기도 하고, ‘리틀 타이거’와 ‘크리스’가 서로 많이 닮아서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줄무늬 네 아이가 같이 모여 있으면 그럭저럭 애 들을 구분할 수 있지만, 따로따로 놀고 있으면 ‘걔’ 가 ‘걔’ 같아서 상당히 헷갈립니다. ‘하루’ 가 ‘내일’이 같기도 하고, ‘내일’이가 ‘하루’ 같기도 하지요. 어제 저녁에도 동네 산책길에 길냥이들 놀이터에 잠깐 들렀다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의 목에 매어진 줄이 털에 파묻혀 아예 안 보이더군요. ‘하루’에게 조금 작아진 것 아닌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년 말에 강추위가 몰려온다는데, 이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하루’의 목 줄에 ”음식을 주지 마세요“ 라고 삐뚤 빼뚤 쓰여있던 것으로 봐서, 누군가 이 아이들을 계속 돌보고 있겠지요?
년말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겨울 저녁,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니, 옆동 건물 사이로 언덕길 소나무가 살짝 내다보입니다. 그 소나무 아래 어디쯤엔가 아이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을 것 같아, 제 마음도 덩달아 추워집니다.
조금만 견디면, 문득, 봄은 오겠지요? ‘하루’와 ‘내일’이, ‘크리스’와 ‘리틀 타이거’, ‘블랙 엑스’와 ‘그레이스 그레이’가 언덕 길 소나무 아래서 그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봄 햇살 속에 졸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