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스가 뭐야?
이 이야기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친구가 되었고, 친남매 같은 사이가 되었고, 기꺼이 나의 소울 메이트가 되어 준 나의 또 다른 빈's에 관한 이야기이다.
은빈과의 첫 만남은 내가 입사한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나의 입사 동기였으며, 차분하고 세련된 옷차림, 화려하진 않지만 빛나는 메이크업은 '예쁘다.'라는 첫인상을 남겨주었다. 또한 차갑거나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입사 동기라는 이유로 우리는 빠른 시간에 친해졌고, 어느새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잠시 쉴 때면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온갖 개드립이 난무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잠깐의 개드립에 깔깔대며 웃는 게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이었다. (나에게는 담배라는 허락된 또 다른 마약(?)이 있었지만.)
그녀와 나는 퇴근 후 친한 동료들과 함께 밥(=술)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직장인에게 퇴근 후 들이키는 한 잔은 쓰디쓴 하루의 디저트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잠실에 있던 사무실의 특성상 우리는 잠실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 날 또한 사무실 근처의 유명한 곱창집으로 달달한 하루의 디저트를 즐기러 갔다.
'대갈 곱창'이라고 적혀 있는 작은 곱창집으로 들어서자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곱창집의 특별한 점이라면, 양념 곱창이 정말 맛있다는 점이었다. 곱창을 좋아하는 이 근처의 회사원들은 다들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은빈은 이미 한 번 와 보았고, 나를 포함해 함께 온 동료는 처음이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다른 테이블의 곱창을 보고 있자니 군침이 돌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시킬까? 야채 곱창 두 개, 양념 곱창 두 개?"
"아니, 오빠. 야채 하나, 양념 두 개 하고 밥 볶아먹자!"
자리에 앉아 세팅이 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속전속결로 메뉴 결정을 완료했다. 주문을 하고 이제 메뉴가 나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 시간이 제일 싫다. 익어가는 곱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림의 떡 같다. 아니, 그림의 떡보다 더 하다. 이건 그림이 아닌 내 눈앞에서 소리를 내고,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곱창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테이블은 각종 반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곱창은 노릇노릇 익어 우리에게 먹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는 젓가락을 들어 야채 곱창과 양념 곱창을 넘나들며 배고픈 허기를 채움과 동시에 쓰디쓴 하루의 디저트로 몸을 진정시켰다. 우리는 그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자몽 소주와 함께 곱창 만세를 외치며 알딸딸함에 취해가고 있었다.
"아 맞다. 오빠 나 책 샀어."
"응? 갑자기?"
은빈은 갑자기 책을 샀다며 당시 가수 타블로가 낸 신작 <블로노트>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책은 아담한 사이즈였고, 표지는 딱 은빈이 좋아할 만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은빈은 신이 나서 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 타블로가 라디오 진행하면서 짧은 글귀 같은 거 소개했는데 그거 묶어서 책으로 낸 거래! 앞에 조금 읽어봤는데 완전 좋아. 오빠도 다 읽고 빌려줄게!"
신나서 말하는 은빈의 옆에는 같은 책의 미니버전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당시 (요즘은 모르겠지만) 책 표지랑 동일한 작은 수첩 같은 걸 사은품으로 주기도 했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런 사은품에 꽂히곤 했었다.
"근데 그 작은 책은 뭐야? 수첩인가?"
"오빠, 내 말은 들었어?"
아주 분명히 잘 들었다. 단지 저 수첩이 너무 궁금해서 먼저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그, 그럼! 타블로가 라디오에서 말한 거 책으로 낸 거라며. 그래서 그거 뭔데?"
은빈은 장난스럽게 날 째려보더니, 궁금증의 주인공인 작은 책을 들어 보였다.
"이거 에센스."
에센스? 내가 아는 에센스는 헤어 에센스나 얼굴에 바르는 에센스 밖에 모르는데. 에센스가 뭐야..?
"혹시 엑기스 말하는 거야?"
"오빠, 그걸 또 집는다! 그래 엑기스!"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웃음이 터져 나왔고, 한참을 '엑기스'와 '에센스'에 빠져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틀린 말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면 그걸 집어내 꼭 한바탕 웃어넘기곤 했다. 우리에게 이건 일종의 게임이었다. 기분 나쁜 트집이 아닌 잠깐의 휴식이 될 수 있는 게임.
결국 그 날, 그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애센스'에 묻혀 더 이상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은빈은 나에게 그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책장 어딘가에 우리의 곱창 냄새를 기억하며 올곧게 서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에센스'와 '엑기스'의 차이는 별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엑기스'는 영어 엑스트랙트(extract)에서 나온 말이고, 엑스트랙트(extract)의 일본식 표기법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은빈은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심심할 때, 언제나 만나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다. 어쩔 땐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 어쩔 땐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아 서로를 찾는다. 어떤 심각한 일이 있었어도 그녀와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나아진다. 그녀와 만나 아무 생각 없이 개드립을 하는 것도 좋고, 진지한 이야기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는 것도 좋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 은빈은 내게 꼭 필요한 '에센스'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