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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Mar 11. 2019

재즈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1.

“이제부터 발견할 일이 잔뜩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요. 뭐든 미리 다 알고 있다면 시시하지 않겠어요? 제가 상상할 거리가 없어지잖아요.”



현대 상상력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상상력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습니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모두가 그들의 특별한 상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인간의 상상력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인간의 상상력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상상의 예술입니다. 음악은 그 어떤 것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과’라는 것을 그리거나 혹은 글로 써서, 몸짓으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에게 사과를 뜻하고 있을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사과’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청자에게 그것이 온전히 ‘사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음악은 오로지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악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합니다.


 재즈는 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입니다. 재즈 연주자들의 목표는 ‘늘 새롭게 연주하는 것’입니다. 같은 곡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연주하는 순간의 상상력이 중요하지요. 또한 그 연주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상상력도 중요합니다.


여러 상상력들이 만나는 순간, 이것이 재즈입니다.


재즈 연주, 특히 스탠다드 재즈곡의 연주의 과정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우선 ‘헤드(haed)’라고 부르는 악보상에 기보되어 있는 화성진행과 선율을 중심으로 한 테마가 연주됩니다. 이것이 연주의 시작이며, 앞으로 벌어질 즉흥 솔로를 향한 출정식이 되는 셈입니다.


관객들은 이 테마가 앞으로 연주자들의 즉흥 솔로 연주에 따라 어떻게 위반되고 전복될 것인지를 기대하게 되고, 연주자들은 서로의 음악적 균형을 맞추게 되지요.


테마가 한 코러스 연주된 후, 즉흥 솔로 연주가 시작됩니다. 솔로는 연주에 참여하고 있는 연주자 모두가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테마에서 선율을 걷어낸 뒤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냅니다.


이 순간에 연주자는 상상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찰리 파커가 되어 연주할 수도 있고, 엘라 피츠제럴드가 되어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관객들은 가끔 연주자가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찰리 파커가 자주 사용하는 선율을 인용한다든지,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든지, 아니면 모두가 알만한 유명한 선율을 연주한다든지 하는 방식에서 말이지요.


그 순간 관객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됩니다. 마음이 맞닿은 것이지요.


모든 연주자들의 즉흥 솔로 연주가 마무리되면 처음에 연주했던 테마를 한 번 더 연주합니다. 각자의 상상력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연주자들의 호흡은 더욱 잘 맞게 되었기 때문에 연주의 시작에서 들려줬던 테마와는 또 다른 느낌의 테마가 연주됩니다.


연주자들이 솔로 연주에서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연주시간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의 상상력이 아무런 제한 없이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아무런 제한없이 상상력을 펼치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연주자들은 서로가 가고 있는 방향을 몰라서 이리저리 부딪히거나,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한채 연주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원곡의 화성진행과 곡의 형식, 그리고 약속된 연주의 형태 등은 연주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지지대의 역할을 합니다.


추운 겨울, 시청 앞 광장에서 스케이트를 탄다고 생각해볼까요?


빙판 주위로 보호대가 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려고 할 때 보호대를 잡을 수도 있고, 만약 미끄러지더라도 보호대 덕분에 빙판이 아닌 곳으로 굴러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쇼트트랙 경기에서 빙판 주위로 보호대가 없다면 선수들이 미끄러졌을 때 어떻게 될까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이렇게 보호대가 있기 때문에 빙판에서의 움직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원곡의 화성진행과 곡의 형식, 그리고 약속된 연주의 형태 등은 이러한 보호대의 역할을 합니다. 연주자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각자의 상상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가는 길이 멀어졌다가도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즈의 자유는 규범과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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