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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Aug 18. 2019

노래의 시작

1.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냐고?


나도 내가 왜 갑자기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이유가 딱히 떠오르진 않지만, 확실한 건 "용기내서 음악을 해라" 혹은 "열심히 하면 잘 될 수 있어" 식의 의도를 담고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용기가 있다면 다른 일을 해라" 혹은 "열심히 할 수 있다면 열심히는 살겠지"와 같은.


음악활동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음악 전공자와 비전공자. 내 첫시작은 비전공자로서의 음악인이었다.


2000년 밀레니엄,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선배들은 우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공공학번, 영영학번, 빵빵학번, 땡땡학번 등등. 그만큼 우린 새로운 존재였다.


입학 초기, 난 학교에 잘 적응하지를 못했다. 아니, 적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수능에서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던 나는 당연히 학교를 다니며 재수를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은 하필 그 곳에서 평생의 친구들을 만나게 한다. 그 친구들이 진심으로 좋았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 등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녀석이 날 동아리에 데려간다. 실은 그 이전에 꼭  들어가고 싶었던 중대 락밴드 블루드래곤의 오디션에 떨어져 노래에 대한 흥미를 약간 잃은 상태였다.


아, 노래에 대한 내 사랑은 그 당시에도 오랜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참, 국민학교였지. 집에서 아빠와 엄마가 보던 세광애창곡집이나 팝송책을 펴놓고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는 날이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했다는 말이 딱 좋을 듯하다.


목소리가 좀 더 커진 중학교 때는 옷장 속에 들어가거나, 언제부터 집에 있었던 건지 모를 흰색 항아리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노래가 아니라 소리를 질렀다. 왜냐하면,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노다웃의 그웬 스테파니 같은 락커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음이 더 힘있게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엄마는 반상회에 가면 어느 집에서 남자애가 자꾸 소리를 질러 시끄럽단 말을 듣고 모른척하고 와야했다. 그때도 난 중저음에 굵은 목소리였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아예 교실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기독교 학교였는데, 학교에서 나눠 준 성경책 뒤에는 복음성가가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예배를 드렸고, 매해 찬송가 경연대회도 있었으며, 뮤지컬을 하는 동아리에도 가입하는 등, 노래 부를 일이 참 많았다. 노래방에 가는 일도 내 중요한 일상이었는데, 심지어 수능보기 며칠 전까지도 노래방을 드나들었다. 대신 '수학의 정석'을 지참하고 갔다. 문제를 하나 풀면 노래 한곡을 부를 수 있다는 나 혼자만의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시험에서 수학은 나를 배신했지만.


노래가 하고 싶어 잠을 못잤을 정도였으니, 앞으로도 내 인생에서 노래부르는 일을 그렇게 사랑했던 시간은 아마 다시 오진 않을 듯하다. 아무튼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노래하며 내 마음대로의 발성이라는 것을 연마했던 것 같다.


대학 시절로 다시 돌아가보자. 동아리, 그래 타의 80퍼센트, 자의 20퍼센트 정도로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름하여 '흑인음악동아리'였는데, 힙합과 알앤비 음악으로 공연을 하는 곳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락커'인 나에게 힙합은 H.O.T 였고, 알앤비는 박정현이었다. 그만큼 관심이 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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