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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Aug 21. 2019

어떤 것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The Connection, 1962



흑백의 영화는 연주자들이 모여 지내는 방 한 칸에서 모든 서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주로  J.J 라는 카메라맨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며, 극 중 연출가의 목표는 마약 거래의 현장을 생생하게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실재’의 중핵에 가 닿는 일은 불가능하다. 연출가가 원하는 장면들은 도무지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불가능한 일을 자신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연출가를 약간 모자란(?)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그에 대한 풍자인 듯 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영화 초반에 연주자들을 향해 “손을 촬영하면 손 이상의 것이 되는 걸 이해 못 하고 있어요.”라고 한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어쩌면 정반대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흘러간다. 영상은 그것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실은 촬영된 것은 많은 의미가 거세된, 창작자의 의도 만이 부각된 시뮬라크르, 즉 현실의 복제일 뿐이다.


영화 토크 때 축음기를 들고 나와 찰리 파커의 음악을 트는 의문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이 또한 ‘복제’물이 갖는 의미를 풍자하기 위한 감독의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음악 또한 흘러가는 것이고, 재즈는 그 특성상, 연주되는 순간에 생성되고 연주가 끝나면 사라지는 특성을 갖는다. 연주자들의 즉흥연주는 재현불가능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연주가 생성되는 순간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동일한 곡을 동일한 연주자들과 반복하여 연주한다 해도 그것은 매번 다른 연주가 될 수밖에 없다. 연주자들은 매 순간 ‘스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주에는 실제로 참여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것은 언어라는 상징체계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엇’은 상징계에서 공백으로 존재한다.


축음기를 든 의문의 남자가 첫번째 등장했을 때, 판이 튀어서 같은 프레이즈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 무의미한 반복을 통해 우리는 기표의 미끄러짐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찰리 파커의 음반 또한 어떤 순간을 고정시킴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많은 의미를 거세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그 의미가 고정된 복제물일 뿐이다. 누군가가 찰리 파커의 음반을 똑같이 연주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복제의 복제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찰리 파커라는 실재에 가 닿을 수 없다. 그 주위를 맴돌 뿐이다. 헤로인을 함으로써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실재에 대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황덕호 선생님께서 당시 이 영화가 헤로인 하는 장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최초의 영화라 충격적이었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문득 뒤샹의 '에탕도네'가 떠올랐다. 카메라맨의 시선을 통해 연주자들의 삶을 들여다보지만, 관음을 통해 얻은 것을 우리는 기껏해야 '충격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재는 '외상적'이다.


-영화와 토크가 어우러진 씨네바캉스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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