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지 않아?

로션 세일에서 시작된 부부의 합의 학습

by 남지안

평온한 주말 오후, 남편과 코스트코에 갔다. 내가 쓰는 바디로션이 세일 중이었다. 계속 쓰니까 세일할 때 사두자- 싶어 카트에 담던 그 순간, 남편이 물었다.


로션 집에 있지 않아?

"어? 어. 있는데, 세일할 때 사두려고."


뭐 대단히 잘못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순간 괜히 뜨끔했다. 당황해서 변명조로 나온 내 대답이 맘에 안 들었다. 뭐 잘못했어? 내가 계속 쓰는 로션이 마침 세일해서 산다는데. 충동구매도 아니고. 이건 지극히 합리적인 소비라고요.


설명이 됐겠지? 하고 몸을 돌려 다른 섹션으로 가려는데 남편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 쓰고 사. 자기야.

예?


분명 내가 방금 내 행동의 경제적 합리성을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혼란에 빠져 남편을 보는데 얼른 놓고 가자- 가 얼굴에 읽혔다. 아... 됐다 됐어. 일을 키우기 싫어 카트에 담긴 로션을 도로 진열대에 돌려놓았다. 남편은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카트를 끌고 가는 남편 뒤통수를 보는데 짜증이 치밀었다. 와... 아니 로션 하나 사는데도 이렇게 맞춰야 한다고? 결혼 정말 쉽지 않은데? 내가 뭐 쇼퍼홀릭이라도 되면 억울하지나 않겠어. 쓰는 로션 세일해서 하나 사는데 이런다고? 너랑 나 잘 살자고 세일 챙긴 거잖아 내가! 따위를 속으로 외치며 일부러 몇 걸음 떨어져 걸었다.


서로 스타일이 다른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맥시멀리스트 엄마 밑에서 자라 쟁여두는 게 익숙했고, 남편은 자취 경력이 꽤 되어 집에 뭘 쌓아두지 않는다는 본인의 방식이 확고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쓰고 사- 라니, 다 쓰고 사는 게 어때? 도 아니고.


짜증의 이유는 또 있었다. 나는 바디로션을 두 종류 쓴다. 하나는 남편도 함께 쓰는 평범한 바디로션, 나머지 하나는 밤에만 바르는 기능성 바디로션. (남편은 그런 거 모르고 그냥 손에 잡히는 걸 바른다.) 기능성 바디로션은 꽤 비싸기도 해서 세일할 때 미리 사두는 게 내 방식이다. 이걸 몇 번이고 얘기했는데. 그동안 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니.


그래도 일단 셀프 계산대에서 열심히 물건을 스캔하는 남편 뒤에서 혼자 짜증을 삭였다. 일을 키우기 싫어 세일하는 로션도 포기한 마당에 주말의 평온함마저 깨지면 피해가 두 배, 월요일도 더 힘들 테니 피해가 세 배다.





집에 돌아와 나를 짜증 나게 했던 남편의 두 문장을 곱씹어보았다. 딱히 문제가 없다. 사실 너무 짧아 문제조차 될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렇다면 짜증의 이유는 나에게 있다. 나는 왜 그렇게 제로백 3 초급 짜증이 났던 걸까?


먼저, 남편의 "집에 있지 않아?"는 단순 팩트체크였는데, 그 말을 "합리적이지 않아"라는 지적처럼 의역해 들었다. 남편 머릿속 논리는 [집에 있음?] - [있음] - [그럼 다 쓰고 사자] 였을 텐데, 내 귀에는 [그걸 사는 건 비합리적이야] - [아니야, 세일하니까 합리적이야] - [그래도 사지 마]로 번역되어 들어왔다. 타당한 이유를 내세웠는데도 "사지 마"로 결론이 나니, 내 기준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짜증이 난 거다.


그리고 만약 정말 내 소비를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한 거라면, 그게 왜 이렇게까지 감정을 흔들었을까? 아마도 내 뿌리 깊은 직업병 때문일 것이다. 경제 전공에 은행에서만 일해 온 나는 기회비용과 효율 계산으로 하루를 산다. 그런 내가 로션 하나 사는 문제에서조차 판단력을 의심받는 듯 느껴지니, 일단 억울했다.


거기에 덧붙여, 두 로션을 번갈아 쓰고 세일할 때 쟁여두는 내 방식을 몇 번이고 말했는데도 남편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결국 억울함과 서운함이 겹쳐져, 순간적으로 짜증이 폭발한 것이다.




결국 나는 전략을 바꾸었다. 말로는 아무리 얘기해도 한 귀로 흘렀으니, 행동으로 각인시키기로 한 것이다.


세일이고 뭐고 그냥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로션이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로션이 떨어졌어- 주말에 가서 사야겠다- 리스트에 적어놔야지- 로션이 없다 로션이- 옆에 있는 남편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서 룰루랄라.


똑같은 "집에 있지 않아?" 도 "다 썼어."로 가뿐히 넘겼다. 분명 집에 로션이 있는데... 하는 의문을 가진 듯한 남편의 표정에도 굳이 부연설명은 하지 않았다. 집에 기본 로션이 몇 통이나 남아 있어도, 이건 그걸로 대체할 수 없는 거란걸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의지였다.


그렇게 정가 주고 산 로션이 세 통을 돌파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코스트코에서 계산대로 향하는데, 생필품 코너를 유심히 보던 남편이 먼저 말했다.


자기 로션 쓰는 거 세일한다. 세일할 때 사둬.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긴 여정이었다. 이런 게 다 결혼이겠지.



참고로 로션이름은 엠락틴이다. 미국 코스트코에서는 할 때마다 $5 세일을 하는데, 이 전략을 고수하는 동안 두 번쯤 놓친 듯. 그러니까 맞춰가는 데 든 비용이 $10쯤 되는 셈이다. 나름 싼 값에(?) 컨센서스를 이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