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치

책임이 한 발 물러난 자리에, 행복 한 잔

by 남지안

롤러코스터 같은 각자의 사회생활에서 퇴근 후, 저녁 식사까지 챙기고 나면 온 가족이 자연스럽게 거실로 향한다. 남편, 나, 그리고 우리 강아지 리오. 셋이서 소파에 널브러져 꼼짝 않는 게 사랑스러운 하루의 마무리다. 그 와중에도 올바른 남편은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된다며 정자세로 앉아있고, 나는 왼쪽으로 누우면 괜찮대- 하는 낭설을 주워섬기며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사이, 강아지는 우리 다리를 베개 삼아 몸을 동그랗게 만다.


TV 화면엔 예능이 한창이지만 누구도 집중하진 않는다. 남편은 대충 보다 말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나는 코를 박고 깊은숨을 내쉬는 강아지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몸을 눈에 담는다. 평온한 밤이다.


그날도 늘 그렇듯 남편은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집중한 눈이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궁금해져 물었다.


“뭐 봐?”
“아, 이거 디스케일링 솔루션이 따로 있어서 시켜보려고. 가루로 된 건 잘 안 녹잖아.”


아 그게 잘 안 녹아? 여과 없이 툭 내뱉은 말에 응- 하고 짧게 대답한 남편은 하던 일로 돌아갔는데,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한 번도 에스프레소 머신 관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어른이 된다는 건, 애석하게도 어릴 적과 달리 사용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따라온다는 뜻이다. 세탁기를 돌렸다면 빨래를 널어야 하고, 컵을 썼다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매일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신다면, 그 기계를 관리하는 것도 당연한 내 몫이다.


그런데 나는 매일 아침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면서 디스케일링도, 물을 채우는 것도, 원두를 채우는 일도 한 적이 없다. 일부러 피하려 한 일도 아닌데, 어느 순간 그냥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늘 준비된 상태여서 나는 그저 원두가 갈리면서 나는 고소한 향을 즐기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문득 깨달았다. 이건 남편이 나에게 선물한 사치구나.


화려하거나 값비싼 물건이 아니어도, 어른에게 사치란 뜻밖의 순간에 찾아온다. 내가 감당해야 할 줄 알았던 것에서 살짝 비켜날 수 있는 순간.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깨달음이 가라앉은 후 마시는 커피는 매일 마셔도 특별하다.


늦은 저녁까지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데,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잘 다녀왔어? 익숙한 손길로 디스케일링 용액을 채우며 남편이 물었다. 묻는 말에 답은 않고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이거 다 해주는 게 오빠가 나한테 선물하는 사치야. 럭셔리하다.”
“그러게, 이거 하는 법도 모르지?”


담백한 답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하던 일에 열중하는 남편의 무심한 뒷모습에 따스함이 스몄다. 이런 사람과 살아서 다행이라 혼자 생각했다.


모름지기 사치는 사라질까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는 법이다. 이 사치를 오래 누리고 싶어서일까, 나는 여전히 디스케일링 법을 모른다. 그저 사치를 조용히 음미할 줄만 안다. 그래서 더 좋다. 여느 카페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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