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우간다 해외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너희는 나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
나는 그런 너희에게 환한 미소를 심어주고 올 거야.
누구보다 빛나고 예쁜 미소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말이다. 나는 봉사활동 기간 동안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 내가 쓰게 될 소감문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해준 모든 이들과,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에게 올리는 감사의 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만난 윌페드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말을 건네면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봉사란 내가 베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까지 도와주려 하곤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나 거만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이 아니라, 진심 어린 시선과 관심, 그리고 이해였다. 똑같은 인격체로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수업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도 수업을 듣는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기억하려 노력했고, 열심히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내게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짓고 달려와서 안겼다.
엔테베 보육원에 갔다. 마음의 상처를 안은 아이들에게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먼저 예쁜 미소로 우리들을 반겨주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이발봉사를 하며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은 값진 경험이었고 짧아진 머리를 매만지며 쑥스럽게 웃는 표정을 보면 나도 괜히 수줍어지곤 했다. 그들 중 유독 내 곁을 맴돌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인생과 가치관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간이 좀 흐르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여유 있는 바람이 불어올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건물 뒤편으로 가서 앉았다. 너는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고 물어보자, 그 아이는 내게 ‘지금’ 이라는 짧은 대답만 안겨줄 뿐이었다. 나는 달리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떠한 말로도 이 아이의 감정을 흡수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때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얼마나 목이랑 눈이 뜨거워졌는지 모른다.
남수단 난민촌에서 우리는 소정의 식량을 나눠주고 있었다. 설탕과 비누, 양파, 과자, 그리고 옷가지 등을 나누어 주는데 그들은 서로 차지하겠다고 치열하게 빼앗고 싸웠다. 정말이지 마음속 한편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단어 그대로 ‘생계’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내가 지금 당장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주어진 매뉴얼대로 하는 것. 그게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봉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작은 위로와 기쁨을 주고 오고 싶었는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섣불리 개입했다간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과, 어설픈 공감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거울을 보고 너덜너덜해진 옷을 보며 다짐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회를 만드는 큰 사람으로 자라겠다고.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을 해주었던 해외봉사 단원들을 한 번씩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혼자 숨죽이고 울며 자책만 했을 것이고, 이런 값진 경험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소중한 확률로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좋지 않았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하자고, 모두에게 고맙기만 한 마음을 안고서 정말 수고했다고, 힘들어도 미소 잃지 않아줘서 나도 웃을 수 있었다고.
눈을 깊게 마주치며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