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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난지 May 13. 2021

펜데믹 아포칼립스에서 찾은 인간성과 희망

<스위트 홈>과 <20세기 소년>을 중심으로

팬데믹 아포칼립스에서 찾은 인간성과 희망 <스위트 홈>, <20세기 소년>


펜데믹 상황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아포칼립스 장르

콘텐츠 속 캐릭터의 성격을 극명하게 나타내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캐릭터를 극한 사건에 몰아넣는 것이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사건에 빠졌을 때 내면의 두려움이 작동되어 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재난물이라 일컬어지는 아포칼립스 장르의 캐릭터들은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과 그에 따른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재난은 비현실적이지만,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면면은 독자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도록 현실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재난마저도 현실이 되어 버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포를 체험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아포칼립스 콘텐츠에 대한 공감대는 캐릭터 뿐 아니라 세계관까지 확대되어 더욱 강화된다.      


아포칼립스는 언제나 현실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왔다

‘uncovering’이란 의미의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고 소망을 충족하는 이중의 시도로서, 소망하는 세계와 인간상을 그리기 위해 소망과는 반대되는 상황과 인간상을 만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웹툰에서의 아포칼립스 장르는 종종 좀비와 관련되어 나타났다. <좀비의 시간>(2008), <당신의 모든 순간>(2010), <좀비딸>(2018), <데드 라이프>(2018) 등의 웹툰은 손 쓸 수 없이 발현된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가족 혹은 자신이 좀비로 변하여 겪게 되는 일을 다뤘다. 특별한 점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좀비가 되었거나 좀비와 공존하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난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때에 이들은 공감과 이해를 통한 개인과 개인의 정서적 연대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 상황과 대응되는 아포칼립스 장르물은 코로나19 펜데믹을 실제로 겪지 않았던 시대에도 대중의 공감을 얻으며 진화해갔다. 그러므로 현재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더라도 아포칼립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괴물이 되어버린 세계와 사람들

2017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된 김칸비, 황영찬 작가의 <스위트 홈>은 은둔형 외톨이 차현수가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혼자 생활하기 위해 오피스텔로 이사를 하며 전개된다. 가족과 함께 할 때는 스스로 문을 닫아 고립을 선택했다면 이제는 여닫을 문도 없는 한 칸짜리 방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혼자다. 무기력과 비관에 빠진 차현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계획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계획하는 것이 쉽다. 현수가 한 달 뒤에 자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자 삶의 문제가 닥친다. 옆집 여성이 괴물이 된 것을 목격한 것이다. 현수는 자신이 몰두하던 가상의 세계보다 더 거짓말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의식을 잃는다. 깨어난 현수는 옆집 여성이 괴물이 된 것이 사실이며, 본인도 괴물의 전조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수의 세계는 알 수 없는 위험에 빠졌다.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들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공격하고 대통령마저 살해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하면 괴물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변형이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언제 욕망에 먹힐지 알 수 없어 공포와 불안은 극에 달한다. 안타깝게도 현수에게는 죽음을 ‘계획’한다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삶의 통제력을 잃은 현수가 죽음마저 통제할 수 없을 때 또 한 번의 무력감과 절망이 그를 사로잡는다. 현수는 갑작스러운 세계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현실에 대한 감각도 소거되어 보이는 현수의 작중 설정으로는, 현실을 원망하고 부정하며 이기적인 모습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현수는 괴물이 되어가면서도 아래층에 남겨진 어린 남매를 구하려 위험에 뛰어든다. 죽음을 계획한 포기한 삶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현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이끄는 행동은 희망 없이 불가능하다. 다르게 생각하면 현수는 인간답게 사는 것을 부정당했기에 죽음으로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며, 죽음을 선택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죽음이지, 괴물로서의 죽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괴물이 된 세계를 통제할 때 발휘되는 희망과 사랑의 감각  

한편, 1층에서는 괴물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오피스텔에 생존한 사람들을 구하려는 계획을 꾀하고 있다. 이 그룹에는 다양한 세대들이 혼재되어 있는데, 리더는 18세의 이은혁이다. 이은혁은 차현수처럼 부모 없이 살며 현실 세계보다 가상 세계가 익숙한 동갑내기다. 리더로서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이은혁의 면모는 어른의 역할을 일찍 부여받아 온 개인사에 의한 것이다. 차현수도 마찬가지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망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자신을 받아준 그룹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세계라면 이들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보호를 당하는 신세다. <스위트 홈>은 주요한 인물 설정과 이야기에서 보이듯 기성세대와의 단절, 기성세대가 쌓아올린 세계와의 분리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 세대의 고난이 주요하게 드러난다.      


<스위트 홈>에서 현수와 은혁의 고난을 보노라면 현실반영 측면에서 욕망을 거부당하던 세대에서 욕망조차 갖지 못하는 세대로 호명 당하는 청년 세대의 절망이 떠오른다. 기성세대나 국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아득바득 살다 결국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거나 차마 괴물이 될 수 없어 루저로 낙인 찍혀 사는 것. 그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여정 한복판에 놓였다 하더라도 차현수는 인간성을 놓지 않고 따뜻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차현수는 괴물화 된 세계의 이단아이자 소망하는 것들을 위해 작은 불빛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1999)의 켄지와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1999년의 재난물에도 희망을 품은 주인공은 있다

<20세기 소년>의 주인공 켄지는 누나의 행방불명으로 조카를 대신해서 키우고 있는 평범한 남성이다. 어린 시절 락 음악에 빠져 가수가 되려는 꿈도 갖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삶을 위해 포기했다. 그러나 재난의 전조는 물이 담긴 컵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트린 듯 켄지의 주변을 서서히 물들인다. 이 재난은 켄지와 관련되어 있고 어지러운 세상의 해결사는 켄지란다. 거짓말 같은 소명을 받은 켄지는 종교가 되어버린 ‘친구’라는 세력에 맞서 세계를 구해야만 한다. 켄지도 차현수처럼 가짜 같은 현실에 던져진 평범한 사람이다. 꿈을 이룬 것도 아니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켄지에게 루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세계를 구하라니, 소명이 지나치게 거대하다.      


소명이 켄지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20세기 소년>의 재난은 켄지를 시기했던 어린 시절 ‘친구’의 복수심에 의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친구’는 세계를 병들게 하기 위해 전염병을 창궐시킨다. 이 세계에서 백신은 돈이 있다고 해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로부터 인류는 백신을 얻으려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살기 위한 행동이니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목적이든 맹목적인 경쟁은 시기심을 부추길 뿐이다. 시기심은 차라리 모두 망해버리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은 안 된다는 파괴적 상상과 행동을 야기한다. 인류를 번영하게끔 만든 인간성과 가치들은 살기 위해 벌이는 경쟁과 반목, 배신, 살인 등의 파멸적 행위에 의해 무력화된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켄지와 친구들은 선한 의지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욕망은 없어도 희망은 품는다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재난의 소재인 전염병과 백신은 코로나19에 대항하고 있는 현 인류의 모습과 닮아있다. <스위트 홈>의 괴물화 과정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 싸울 욕망조차 품지 못하는 청년세대들의 아픔을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인류사를 돌이켜 봤을 때 전 세계적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 폭력과 혐오적 행동이 증대된다고 한다. 바이러스에 대한 강한 두려움과 혐오가 생존에는 이롭기 때문이다. 켄지나 차현수는 이런 행동들과는 반대되는 가치를 추구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가치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여서가 아니다. 그저 그것이 인간답기 때문이다.    

  

절망의 가면을 쓴 아포칼립스가 내포한 진실은 인간성에 대한 희망

‘두려움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하기를 멈춘다면 두려움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두 감정의 차이점은 ‘두려움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에 집중하고 희망은 좋은 결과에 집중한다’는데 있다. 차현수와 켄지의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는 두려운 상황에서 희망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아포칼립스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상상이 결합하여 종말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아포칼립스 장르가 예측 불가능하고 급변하는 세계의 불안과 두려움을 내포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선한 의지와 희망을 내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작품들을 감상하는 우리도 이 지난한 현실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다. “세상 가장 진한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지는 거니까.”          



『기획회의』 530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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