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울과 양평- 그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대하여
-박완서 작가님을 기리며
안아주고 싶도록 작은 몸피를 한 중년의 여성이 단상 위에 오른다. 땅을 디디지 않고 걷는 것처럼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단상에 올라 앞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은 산속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수처럼 맑고 투명하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주름진 얼굴이건만 눈만은 시간을 비껴간 것 같다. 귀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소녀 같은 단발머리를 한 여인이 관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맑은 물에 작은 파문이 일며 물살이 퍼져나가듯 번져가는 엷은 미소였다. 그저 한 송이의 수선화 같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푸른색 수선화가 있다면 저 여인이 아니었을까...
때는 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문학상 수상식에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던 20대의 나는 이렇게 처음으로 '박완서'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잠깐의 조우로도 평생 지울 수 없는 각인된 기억, 박완서 선생님과의 기억이다.
작품으로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뵌 건 고1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서부에 들어오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빛나는 눈동자로 동아리 소개를 하던 2학년 선배의 모습에 반해, '책을 좋아하니까'라는 이유로 도서부에 들어갔다. 대형 토론회 작품으로 박완서 선생님의 <나목>을 택해 몇 번이나 정독하며 토론을 준비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책을 빌리러 오는 학생으로 소란스러웠지만, 방과 후 어둠이 찾아오면 도서관도 차분히 가라앉고, 그때의 도서관은 우리들 소유가 되었다. 새책에서 느껴지는 손을 벨 것 같은 빳빳함, 바스러질까 두려웠던 오래된 책의 누런 속지들, 몇 권씩 책을 나를 때 느껴졌던 팔의 긴장감, 저녁으로 먹은 떡볶이의 붉은 국물과 알싸한 매운 냄새, 그리고 질질 짜고, 까르르 웃었던 우리들.
이 속에서 나는 작가가 되리라 결심했다.
박완서 선생님은 40살에 등단하셨다. 그리고 등단한 뒤 홍수가 난 강이 흘러넘치듯 그렇게 내면에 차 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정한 이야기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박완서 선생님처럼 농익은 이야기를 마련하는 시간을 보낸 뒤, 40살이 되면 꺼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담으리라 결심했다. 선생님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고등학생 이후에도 선생님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나를 찾아왔고,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실존'했던 선생님의 흔적을 찾고자 '아치울 마을'로 향했다. 서울의 광진구와 구리, 그 경계에 아치울 마을이 있다. 선생님은 오랜 세월 이곳의 전원주택에서 시간을 보내며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고, 백가지가 넘는 식물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며 글을 써 내려갔다.
2012년 봄, 박완서 선생님 댁 앞에서 선생님은 아치울이라는 마을 이름을 좋아했고, 본인 때문에 마을 이름이나 풍경이 바뀌는 걸 싫어하셨다. 그만큼 아치울을 사랑했다. 나는 선생님이 사랑했던 아치울로 이사를 갈까 하다 양평을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선생님에게 아치울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양평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양평에서 7년을 살았다. 선생님 같은 작가의 길을 가리라 결심했던 세월은 흐르고 흘러, 약속한 나이 40이 훌쩍 넘어 버렸다. 일에 밀려, 육아에 밀려, 파도를 넘고 넘으면서도 저기 보이는 섬, 내 꿈에 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렵고 두려웠을까. 공부를 한 게 독이 되어, 명작을 쓰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언젠가는 가야지 가야지 하며 미뤄두던 시간이었다. 그냥 섬에 가서 꽃 하나 심고, 나무 하나 심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 하나쯤은 피어날 수 있었을 텐데.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지는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이곳 브런치에서 나를 조금씩 내보이는 용기를 얻고, 약속을 지키려고 끙끙대는 나를 응원할 뿐이다.
아치울은 내가 사는 이곳 양평에서 40분이면 갈 수 있다. 그러나 아치울의 '박완서' 선생님과 양평의 '나'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그래도 하늘나라에서 박완서 선생님은 이런 나를 지켜보며 그 엷은 미소를 지어주실 것만 같다. 괜찮다고, 모두 다 괜찮다고. 그저 시작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