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전 일기를 꺼내보며
뭔가 잡생각이 들려고 하면 생각이 거미줄처럼 퍼지는 게 싫어서, 단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나 자신을 혹사시키는 고약한 습관이 있다.
운동의 강도를 높이거나, 집안 대청소를 구석구석 한다던가, 밤을 꼴딱 새우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래서 이혼을 하고 몇 년간은 육아도 열정만렙이었지만, 일도 워커홀릭 소리를 듣고 살았었지.
작년 말부터 매일 필사를 습관으로 하고 있었는데, 3월부터는 매일 운동 목표를 추가로 세웠다.
뭔가 몰입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숨 가쁘게 "계단 오르기"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사무실이 고층에 있어 회사에 운동화도 가져와서 꾸준히 하면 둘레길이나 등산을 다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오늘 오르다 보니 나 이거 옛날에도 도전한 적이 있었지!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 그때 사무실의 붉은 벽을 바라보며 나선형 계단을 끊임없이 올랐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서른일곱,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었나, 일기를 뒤져보니 다행히 계단을 오르며 쓴 일기가 남아있다.
새해가 되면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매일매일 계단 오르기.
작년에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요가를 쭉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그만두고 나니 몸이 굳고 피로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한번 관두고 또다시 시작한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어영부영 겨울을 맞이했다.
그래서 다시 피트니스를 등록할까 싶어 이래저래 알아보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할 수 있는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아이유의 운동법이라며 아재 티를 내며, 직장 상사가 추천해 준
"계단 오르기"
회사에 아예 운동화까지 가져다 놓고, 옷차림과 상관없이 열심히 오른 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처음에 일주일 정도는 10층 정도 높이로만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하루 총 20층)
둘째 주 이후로는 20층까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하루 총 40층)을 오르는 셈.
계단을 처음 오르던 첫날 숨이 가빠져서 뒤로 넘어갈 것만 같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숨은 차고, 다리는 후덜덜, 심장은 터질 것 같고, 겨우 10층까지 올라가면서 내는 거친 숨소리는 1 층서도 들릴 것처럼 요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하고 보니 10층이 생각보다 쉽게 올라가지더라.
그럼 20층 도전?!
한 달여간 올라 다녀 본 결과, 나도 놀랐다 내 몸이 이렇게도 빨리 환경에 적응을 하는가.
끝도 없을 것 같은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뭔가 가장 꼭대기 근처가 가장 지치고 힘들 것 같지만, 사실 꼭대기 근방이 되면 곧 끝난다라는 기대와 희망에, 없던 다리 힘도 생긴다.
가장 힘든 구간은 딱 중간쯤 그 언저리, 더 올라가기도 힘든데, 그렇다고 포기하려니 아깝고, 그런데 힘은 점점 빠지고 어려운, 딱 그 중간쯤에서 항상 괜히 시작했나 후회도 들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계단을 끝까지 정복하고야 말겠다고.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숨소리만 내고 20층까지 올라가다 보면, 이 계단이 나의 인생 계단으로 느껴지는 귀한 찰나의 순간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든, 행복한 인생의 완성을 위해서든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고 지금처럼 한 칸 한 칸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내 나이 서른일곱.
어쩌면 20층 계단을 인생으로 본다면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포기하고 내려오기는 아쉽고, 다 오르자니 점점 힘이 부치고, 기력이 달리지만, 갈 길이 한참 남은. 가장 어려운 구역.
가장 용기와 끈기가 필요한 구역.
아이는 여전히 내 손을 필요로 하고,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에너지는 고갈되고, 나만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거 같고, 게다가 난 이제 이혼을 겪으며 한부모라는 타이틀까지 감당해야 한다.
아이를 통해 행복을 느끼다가도, 깊은 밤 잠 못 들고 억울함, 공허함, 외로움과도 싸워내야 하는, 역시나 서럽고, 어려운 구역이 맞다.
그럴 때. 계단을 올라 가 본 경험치로 비유하자면, 층 사이사이에 층수가 적힌 표지판은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낫더라.
층수를 자꾸 의식하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구나", "아 괜히 시작했나,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데, 그냥 보지 말아야지 하고, 고개를 아래로 박고, 묵묵하게 내 발 앞에 놓인 계단만 보면서 오르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면 생각보다 많이 올라와있다.
나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하게도 말이다.
그리고 오르는 속도는 기복이 있는 것보단, 가능하면 규칙적인 보폭과 속도로 가는 게 덜 지치는 것 같다.
나의 삶도 그 어느 목표지점, 이상향을 정해놓고 그것만 우러러보고 걷다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져서, 그 길이 험하게 느껴지고 힘들고 지친다.
그럴 땐 그냥 내 발아래가 바로 꽃길이다 생각하고,
- 오늘 저녁, 내일 할 일- 같은 당장, 순간순간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듯,
빨리 극복하겠다고 성급하게 뛸 필요는 없다.
그저 한걸음 한걸음, 내 삶의 페이스에 맞게, 나만의 기준에 맞게 "천천히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그렇게 가다 보면, 처음 10층까지 오를 땐 죽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20층은 그냥저냥 쉬이 오르는 것처럼,
내가 목표하고 바라왔던 지점보다, 훨씬 강하고 튼튼하게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높이 도달 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근력을 키워서 작년 제주에서 걸었던 수국 만발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요즘
봄아, 빨리 오렴 ^^ (2017년 1월 31일 일기)
아, 서른일곱의 나,
참 애썼고, 하지만 예뻤네. 마음이.
젊은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며 순간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잖아.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분명 달라졌지만, 생각하는거나 말투를 보니, 역시 나는 나네?!라는 묘한 안도감도 든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는 벌써 8년이 지나 마흔다섯의 중년이 되었다.
신기했던 건 그 옛날보단 나이 들고, 근육도 없어서 당연히 8년 전보다 헉헉대겠지, 오늘 반이나 갈 수 있을까 염려가 가득이었는데, 어라??!! 무려 10분 만에 19층 정복. 중간중간 쉬었는데도 말이다.
하; 이것이 K-주부의 힘인가? ^^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 시절에 내"가 "지금의 나"보다 뤌씬 더 고단했던 것이었다.
분명 더 젊은 나이지만, 그때 나는 지금보단 어렸고, 여렸고, 상처에 예민했고, 마음이 많이 아프고, 무겁고,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계단 올라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지금 느끼는 것보다 훨씬 높고, 더 무겁게 느껴졌을 터. 마음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오르느라 더 힘들게 느꼈던거.
여전히 나는 양육자의 삶을 살고 있고, 회사에서 사회에서 '돌싱'의 부류로 분류되고 속해 세상과 실랑이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다행히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고, 나는 성숙하고, 세상은 변하고,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왠지 내 편일 것 같은 기분으로 더 힘을 내며 살아가고 있기에 오늘 20층에 가까운 그 계단도 좋아하는 노래 두어 곡 들으며 신나게 통통거리며 걸어 올라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곧 겸손해진다
그때의 나에게 눈물 나게 고맙고, 그때의 내가 가슴 벅차게 대견한 마음이 들어,
계단을 꼭대기까지 올라온 통쾌함과 상쾌함은 잠시이고, 물 한잔 들이키며 뭔가 울컥해지는 마음도 삼켜버린 오후.
오늘의 나는 또 먼 훗날의 나를 위해 후회하지 않는 지금을 살아내겠지.
9년 전에 가보고, 그 길에 반해 그다음 해에 다시 가보겠다고 다짐했던 종다리수국 길을 나는 아직도 다시 가보지 못했는데, 올해 초여름은 '과거의 나'에게 칭찬 스티커를 붙여주는 마음으로 훌쩍 다녀오고 싶네.
그 길.
덧) 그런데 안힘든거 같았는데 다시 도전한 첫날 꿀잠 기절은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