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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아니라, 바닥이어도

9월 인왕산에서

by 레몬트리

벌써 일 년

작년 이맘때

사실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등산길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 발끝과 시선 끝을 붙잡은 구절초

한눈에 알아봤지

다시 이곳에,

딱 여기였었다.

한들거리던 너를 보며,

흔들거리던 내 마음이 보였던 날.

운명이란 정말 알 수가 없더라.





한 그루 안에서도 잎이 물드는 건 다르다.

한쪽은 아직 여름인데, 한쪽은 가을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과연, 먼저 가을이 온 쪽은 아닌 쪽보다

해를 더 오래,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해를 보지 못해 빨리 힘을 잃은 것일까

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결국 결론을 만드는 건 시선과 마음일 뿐

이렇게 동전의 앞뒤 같은 우리의 삶






이별을 알려주는 가을의 나뭇잎

사라지고만 너의 존재로

구멍 나 허전한 가슴도 익숙하고

힘없이 시들어버린 눈빛도 알겠는데,

이런,

여기

타들어가는 심장도 있었네

가장 처연하게 아프게 타들어가는 너를 보고

이별. 그래서 가을을 쓸쓸하다 했구나






벽인 줄 알았지.

아니, 바닥이야

더 이상 의지할 곳 없고, 타고 오를 벽이 없다고

멈추거나 고개 숙이거나 뒷걸음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추고 바닥에서도 퍼져간다.

너는 말해준다.

'내가 원했던 건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은 너였을 뿐

네가 높은 벽이 아니라 가장 아래의 바닥일지라도

나는 너에게 몸을 맡기고 너는 나를 품는다'고

내가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관종

하필 그 넓은 숲을 두고

"여기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문 위로

뻗고, 오르고, 넘어와있다.

경고 따위 우습다는 듯

"나를 바라봐 주세요" 라며 싱그러움을 뿜어낸다

다가오지 말라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보지만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던 그 어떤 이처럼

뱉어내는 말과 진심의 눈빛은

종종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고약한 사랑 앞에선





필까 말까 망설이는 뒤늦은 너의 꽃봉오리 앞에서

어서 빨리 피워내라 다그치지 않는다

가을이니 서두르라 재촉하지 않는다

왜 너만 늦냐고 나무라지 않는다

저 작은 가슴에 품고 있을

망설임, 두려움이 가여워

그저 기다린다.




시절인연

그렇게. 나를 온통 영원히 차지할 것 같던 네가

이렇게. 흔적도 미련도 없이 남이 돼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이 바위를 온통 덮어버릴 것 같던 덩굴이

이렇게. 바스락거리는 추억만 두고 사라져 간다.

모든 이별은 쓸쓸하고 말라있다

그리워 한 줌 손에 쥐는 순간 바스락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그리움마저 아낀다




여름 내내 초록색 하트 잎사귀를 보며 미소 지었는데

하트의 결말이 탐스럽게도 열렸네

누가 알았을까

덩굴 잎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줄

그런데 그건 더 몰랐겠지

덩굴 열매는 이렇게 더 예쁠 줄

척박함 속에서도 오르고, 뻗고, 애를 쓰더니

이 가을

여름의 빨간 태양과 파란 하늘을 품어 섞어

이윽고 만들어 낸 보라색 열매

보라, 보라를!

누구보다 탐스러운 해피엔딩




빛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는데 내 빛이 너와 부딪혀

아무리 방향을 다르게 해도

영 못마땅하다

하던 찰나

눈부시다 눈감지 않고

뜨겁다 고개 돌리지 않고

용감하게 정면으로 마주했더니

드디어 포개진 두 빛이

더 선명하고 예쁜 빛을 만들어냈다.

함께일 때, 우리일 때,

가장 나답게 어여쁘고 싶은 마음, 그런데 또

가장 나답지 않게 무모하고 싶은 마음

카메라에 몰래 담아왔지






올해의 1등 코스모스

이렇게 정직한 분홍이라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꽃잎도 곱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너의 꽃받침이 대견하다.

하늘거리는 꽃잎만 보느라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았겠지만

꿋꿋하게 아래서 온몸으로 받치고 붙들고 모아주고 있다

애쓰고 기특한 그 마음마저

하나 생색 않는 숨은 겸손함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접어 가장 아름다운 너의 모습을 담는다.

비록 하늘을 보지 못해도,

비록 꽃으로 너를 기억할 이 없어도

하늘아래 가장 기특한 너를

이제, 내가 기억할게




연인- 너무 예뻐 뒷모습을 찍었지만 혹시 문제되면 삭제할게요 :)


불꽃놀이를 한다더라

우리 산에 가서 볼래?

오늘따라 넘치는 청춘, 붐비는 연인들의 발걸음

이곳은 가을이 아니라 봄 같아

여기선 이마에 부채질을 해주고

저기선 풀린 신발끈을 묶어주고

서로 아끼는 소중한 그 마음

부디 오늘의 불꽃처럼 한순간 사라지지 말고

부디 오늘의 별빛처럼 까만 밤에도 서로의 등불이 되어주길.



한낮부터 밤의 불꽃을 기다리던 연인들은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날 아름다웠던 불꽃보다

끝끝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건

숨소리를 느끼며 속도를 맞추던 발자국과

서로를 붙들던 두 손의 온기와

나란히 앉은 얼굴로 스쳐간 바람과

불꽃보다 예쁘게, 별똥별보다 거침없이

내 마음에 쏟아진 너였다는 걸.







해가 뜨면 생각나고

해가 지면 생각나서

하늘을 찍고, 구름을 찍고, 노을을 찍었다더라

하지만 어느 날 알게 되었다.

온통 찍어둔 세상 아름다운 것들은

온통 네 생각으로 가득 찬 누군가가

다만 너에게 전하고픈 그 마음에 붙일

명분이란 꼬리표로 찍고 있진 않았던가


그리고 결국 망설이다 전하지 못한 그 마음은

가슴에, 사진첩에 켜켜이 쌓여간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혼자만의 고백이 되어.








덧)

9월의 인왕산은 날을 어찌나 잘 골랐는지

여의도 불꽃축제 하는 날이었어요 *좋아했어야 하나, 울었어야 하나ㅎㅎ)

1년째 오르면서 이렇게 한 줄 서기 해가며 산에 오르긴 또 처음 ㅋㅋ

노란색 여행사 깃발 꽂은 단체 관광객까지 봤으니 말 다했죠? ㅋㅋㅋㅋ


가을도 익어가고

마음도 익어가는 인왕산이었어요

저는 인파에 놀라 후다닥 내려왔지만

케데몬과 불꽃축제의 콜라보로 여름 내내 폭염으로 침묵했던 산은

잔칫집 앞마당 같았습니다 :)


1월부터로 치면 아홉 번째 인왕산이라 세 번이 남았지만,

작년 이맘때 첫 인왕산 등산부터 세보면 딱 열두 번 다녀왔어요.

첫 등산 때 한라산 갈 것처럼 등산스틱에 간식보따리를 챙겨 올라갔던 등린이 ㅋㅋ

시간도 계절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

네...우리집 담금주도,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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