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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15. 2019

암흑을 지나 행복에 이르다

사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

둘째에게 분유를 먹이고 점심에 밀린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라디오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둘째를 출산하고 4개월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뱃살과 허릿살을 의식하며 음악에 맞춰 조심스레 엉덩이를 흔들어본다. 첫째 아이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따라 엉거주춤 엉덩이를 흔든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는다.


다시 설거지를 하다 돌아본다. 첫째는 좋아하는 기차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플레이 매트에 눕혀 논 둘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열심히 모빌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 곧 뒤집기를 하려는 지 요즘 들어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졌다.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행복한 기운이 올라와 입가에서 미소를 꽃피운다.

아, 행복하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 순간이 가끔 찾아온다.

아직 둘째가 태어나기 전, 날씨 좋은 주말에는 세 식구가 집 근처로 산책을 다녔다.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를 가장한 엄마와 아빠)에게 선물 받은 가방을 둘러메고, 아빠 손을 잡고 작은 걸음으로 쫄래쫄래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가슴이 가득 채워지다 못해 넘실넘실 넘쳐흐르는 행복감에 벅차올랐다.


요즘 같이 더운 여름날은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온 가족이 산책을 나선다.

놀이터나 강변으로 산책을 가기에는 너무 어둡고 늦은 시간이기에 우리의 목적지는 주로 가까운 편의점이다. 시원한 편의점에서 더위를 잠시 식히고 돌아오는 길, 엄마 아빠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 있고, 첫째 아이의 손에는 캐릭터 모양의 막대 초콜릿이 들려있다.

저녁 산책에 덤으로 따라오는 달콤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첫째 아이의 입 주변에 어느새 초콜릿이 잔뜩 묻어있다.

아직 분유밖에 먹을 줄 모르는 둘째는 흔들리는 유모차에 몸을 맡기고 눈을 끔뻑끔뻑 하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이따금씩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우리를 스친다. 행복하다. 행복함이 차올라 충만해진다. 몸은 덥지만 마음은 시원한 저녁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이런 행복을 느끼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밤에 잠들 때마다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내일 하루를 살아갈 희망도 없었던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암흑의 유학생활


대학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고, 공부를 좀 더 해보고도 싶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 유학을 생각했지만 학비의 부담이 없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문부성 국비유학 제도를 알게 되었다.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3년까지 학비 전액 지원에 생활비까지 준단다.

내 전공분야를 일본에 가서 공부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 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그저 떠나고 싶었고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4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졸업 후 반년이 넘도록 유학 준비에 매달렸다. 그래도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면접도 엉망이었다. 한 번에 붙기를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운이 좋았다. 덜컥 합격을 하고 말았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나를 받아 줄 지도교수님은 직접 찾아야 했다. 급하게 이곳저곳을 뒤져 연락을 취해봤지만 막연하고 두리뭉실한 연구계획서는 부실하기 그지없었고, 지도교수의 연구방향과도 맞지 않아 거절당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이 지긋하시고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은 교수님이 나를 받아주시겠단다. 가르칠 학생도 많이 없고, 퇴임 전에 좋은 일 한 번 하자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유학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상태로 유학 길에 올랐다. 물론 당시에는 의욕에 불타 올라 있었지만, 그 의욕은 오래가지 못했다.


6개월 간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학원에서 듣는 일본어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숙제도 누구보다 성실히 해갔다.

대학원 수업은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일본어는 못 알아들어도 수학 기호는 알아볼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과의 세미나도 서툴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점점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세미나 이외에 어학원 수업이나 대학원 수업에 빠져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함께 온 한국인 유학생들끼리 자주 모이기도 했지만, 각자의 생활이 바빠지면서 모이는 일도 줄어들었다.

비좁은 기숙사 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공부도 생활도 내 스스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내가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의 잔소리나 학원의 도움 없이도 공부를 곧잘 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빨래나 청소도 스스로 했다. 대학교 때는 자취를 했기에 몇 가지 반찬과 찌개 정도는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가 아주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독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숙사에는 함께 웃고 떠들고 때로는 경쟁상대가 되는 친구들이 있었다. 자취 생활을 했지만 혼자는 아니었고, 주변에는 도움을 주는 선배와 후배 친구들이 늘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혼자, 온전한 혼자였다.


견디기 힘들었다. 간단한 생활용품 하나를 사는 것도 혼자 결정해야 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물건들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지만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책임 또한 내가 져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해왔고, 즐겁기까지 했던 그 일들이 지겹고 권태스러웠다.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못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결코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숱한 사람들의 시선과 격려와 칭찬의 말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때때로 질책과 조언이 나를 깨어있게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제거된 상황에서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생활은 독립되어 있었을지언정 정신과 정서는 독립되지 못했다.


외로웠다. 자라는 동안 내내 외로웠기에 그까짓 외로움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껏 내가 겪어왔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문 밖을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점점 외부세계로부터 나 스스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몇 끼를 거르고 배가 고프다 못해 미칠 지경이 되면 모자를 눌러쓰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손에 집히는 대로 먹을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밤늦도록 인터넷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새벽녘에 잠들고 점심때가 지나서 눈을 떴다. 학교에 가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어차피 가 봐야 말 섞을 사람도 없다. 일어나서 씻기도 귀찮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저녁이다. 편의점에서 사다 놓은 컵라면으로 한 끼를 또 때운다.  


세미나 날이 되면 건성으로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학교로 향한다. 한심하다는 듯한 지도교수의 태도에도 이제 이골이 났다.

3-4시간의 세미나를 어찌어찌 때우고 나면 잠시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다음 주가 또 걱정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세미나 전 날이 되면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수없이 많은 밤 눈을 감으며 아침에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문득 깨달아졌다. 나 같은 사람은 유학을 오면 안 되는 거였구나.

외국인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귈 수 있을 정도의 친화력이 있다면 유학생활 동안 여러 사람을 사귀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공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그에 딱 맞는 연구실을 찾아 주변 상황에 관계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나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상황을 돌이킬 의지조차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따박따박 나오는 생활비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열정이라고는 1도 없는 대학원 생활을 겨우 마치고 지도교수가 써주다시피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생활 내내 나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모습 만을 보아 온 지도교수는 나를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몇 시간이고 증명 문제에 매달리고 해결한 뒤에 희열을 느끼던 열정적인 학부 때의 모습을 지도교수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심어주고 말았다. 안타깝고 면목이 없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살아서 그 시간을 지나온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5년이라는 그 시간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후회로 점철된 그때의 기억을 묻어두어야 했고, 내 뇌는 의도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점점 흐릿하게 만들어갔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어렴풋하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나는 우울증 환자였다. 병원을 찾아간 적이 없어 진단을 받지 않았을 뿐.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그 병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국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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