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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되지 않은 도면.

시간과 정성은 결코 헛되지 않다.

by NanA

대표님이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나랑 비슷한 연배이다. 중년!)

“오늘 우리 인턴이 청사진을 봤어. 캐드파일이 없어서 그거 그리고 있어.”

인턴은 23살. 막둥이다. 청사진을 보다니. 쉽지 않은 경험을 했다.


나도 신입 사원 때 처음 봤다. 회사가 여러 번 이사를 했는데 그때 아주 큰 도면이 두 번 정도 접혀 캐비닛이라고 해야 하나. 한 뭉텅이 쌓여있었다. 청사진의 도면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선 하나에 담긴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이 보인다. 도면을 그리며 수없이 고민하고, 다시 그리고, 변경이 생기면 덧칠했던 수많은 시간들. 청사진을 요즘 학생들은 모른다. 불과 이십 년 전인데도 아예 없던 일처럼 업계에서 사라진 유물이 되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아냐고? 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캐드로 도면을 그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권장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림을 그리는 도화지에 점을 찍고 선을 그렸다. 나무의 모양을 평면으로 그리고 단면으로 그렸다. 투시도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연습도면을 그리기 시작할 때쯤 트레싱지로 종이가 바뀌었다. 설계 수업시간부터 교양수업시간까지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끄적거렸다. 그땐, 친구들끼리 서로의 스케치북을 구경하곤 했다. 나는 성격이 급해 스케치북을 다 채우기 전에 항상 새로 사곤 했다. 새로 산 하얀 스케치 북의 첫 장엔 글을 썼다. 하얀 스케치북의 첫 장을 채우는 일은 항상 두근거리는 설레는 일이었다. 생각은 손을 통해 종이 위에 구현된다. 생각이 공간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시작부터 생각하면 참 길고 길다. 그 연습을 무려 이십 년을 한 것이다. 그 설렘은 이제 아이패드에서 첫 프리폼을 그리는 순간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폴더를 만들고 사례사진을 넣고 끄적거림을 시작한다.


캐드로 도면을 그린 지 20년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손으로 옮겨가는 건 여전하다.


이제는 도면조차도 캐드로 그리지 않는 시대가 왔다. 1인 설계사무실은 BIM을 해야 경쟁력이 있다. 모델링을 하면 도면이 추출된다. 물량도 산출해 준다. 그래서 효율적이다. 공공건축부터 적용하자고 매번 새로운 정책이 나온다. 정작 공공기관에서 BIM을 볼 줄 아는 인력, 장비, 소프트웨어가 없다. 모델링을 다시 캐드로 추출하고, 출력을 해서 제본한다. 뭐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설계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참 좋다. 검토도 쉽다. 모델링만 잘해 놓으면 도면을 척척 뽑아내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나는 그 효율성이 건축에 필요한 순간이 아닌 모든 순간에 적용될까 무섭다.


설계 오 년 차 대리 말미쯤, 독립을 고민하던 선배가 영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첫 순간, 건축주에게 전문가로서의 인상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 지구 그리고 땅면적이 나오면 바로 딱! 건폐율, 용적률 계산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이야기 속에서의 건축가의 능력의 척도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공간에 대한 상상과 건축주와의 소통, 실제 구현되었을 때의 쓰임에 대한 고민, 긴 호흡으로 천천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건 너무 사치일까.


건축회사로서의 생존과 건축가로서의 로망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인턴, 학생, 그리고 신입사원에게 늘 말한다.

“ 스케치를 해라. 그려서 가지고 와. 트레싱지에 그려서 스캔해 봐. 일단 그려!”

“제발 모니터 화면 말고 출력해서 검토 좀 하자.”


연차가 쌓일수록 연륜이 더해질수록 생각이 손으로 옮기지도 않고 캐드로 도면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생각의 정리를 소홀하게 된다. 이미 나는 그 연차에 접어들었다. 말랑말랑한 상상을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시간에 도면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친구들에게 그 시간을 놓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언젠가는 스케치하던 시간을 그리워하며 하루종일 캐드만 그리는 나날이 있을 테니.


건축물의 수명은 100년을 본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내가 죽어도 남는 건축물들이다. 그러니까, 도면을 그릴 때마다 아주 오랜 고민이 필요하다. 이게 맞는 걸까? 나는 지금 기계적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생각이 정리될 때마다 도면의 한 세트를 완성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다. 언제나 항상 맞다고 생각한 공간에 오류가 있었고, 더 나은 선택이 있었다. 그 반복 속에 버려지는 수많은 종이들과 데이터들, 아깝지 않다. 하지만 시간은 아쉽다.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래서 BIM을 비롯한 건축업의 극장의 효율화가 무섭다. 어딘가에 창이 있다면 어딘가에 복도가 있다면 어딘가에 화장실이 있다면 다 된 거 아닌가. 계획이 돼서 구현이 된 모델링만 있다면 그저 설계 끝!이라고 프로젝트를 종료해 버리는 이유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수없이 많은 번복과 쓸데없는 내부 협의를 거쳐가면 내렸던 결론도 다시 되돌아보는 사무실도 있다. 그럼 그 사무실의 직원, 또는 건축가는 끝나지 않는 야근 속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어려운 문제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가장 싫은 건 지어진 후 그 건물 속에서 나의 오류를 보는 것이다. 오도카니 서서 내 과오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그 누구도 내게 탓을 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나만 아는 것이다. 그나마 무한 반복 속에 끝나지 않는 야근을 해야 혼자서만 아는 오류 정도로 그치는 것이다.


처음 땅을 만나면 시작하는 스케치부터, 마감이 없는 두 개의 선으로 그려나가는 계획도면, 수십 장의 도면을 출력하고 검토하는 실시도면까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한 개의 건축물은 내게 각인된다. 어느 시기가 되면 공간을 외우게 된다. 그래서 시공된 현장에 가면 시공사가 무엇을 바꾸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도면을 보면 안다. 이 도면은 누군가에게 각인되어 있겠구나.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그 고뇌의 끝에 다다른 결론이 이 것이구나. 그리고 공간을 보면 더욱 알게 된다.

그래서 슬플 때가 있다. 각인되지 않은 도면들. 이미지만을 구현해 놓은 건축물. 화려한 이미지 뒤에 정교하지 못한 공간들. 그리하여 결국 욕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수많은 건축가들. 나름의 뭔가 사정이 있겠지. 적은 설계비, 말도 안 되는 설계 기간, 시공사의 내 멋대로 설계변경, 준공식, 착공식 그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설계자에 대한 예우. 그 모든 것을 알기에 나는 같은 업계의 사람들을 욕할 수 없다. 그저 현실이 슬프다.


건축가의 의무, 양심에 기대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다. 결국은 모두의 생각이 바뀌어야 업계가 변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하던 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는 없다.

적어도 이 모습이 내 후배들이 힘들고 외롭고 참 더럽게도 돈이 안 되는 건축을 사랑하는데 조금이라도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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