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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출장길에서

by NanA

유튜브가 대세가 되는 걸 보면 은사님의 말이 떠오른다.

“중원에 숨어있는 고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니?”

이제는 연락이 끓겼지만 내게 첫 직장의 인턴자리를 연결시켜 주신 귀한 분이시다. 교수추천서도 써주셨다. 비록 전임강사는 아니었지만, 나 홀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시며 나름 이름 있는 분이셨다. 취업 이후로도 여러 가지 제안을 주셨지만, 차츰 연락이 끓기며 나는 결혼을 했고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중원에 숨어있는 고수가 되었다.


나는 고수가 맞겠지?


심심하면 유튜브의 짤을 본다. 뭐 다들 그렇게 사니까. 어른이 돼서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의 잔소리를 들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나쁜 건 알지만 그래서 뭐, 내 인생인데 어쩌겠어.

기안 84와 침착맨의 대화의 짧은 짤에서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다.

직원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침착맨이 조언한다. 손발을 맞추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공을 들여 합을 맞춰야 한다고.

브랜드의 대가가 직장생활에 대한 정답을 말한다.

리더는 자신보다 똑똑한 직원을 고용해야 하고, 팔로우(부하직원)는 돈 받으면서 자기계발한다 생각하고 열정을 다해야 한다. 업무를 지시할 땐 정확하게 자세하게 얘기하고, 업무의 질 향상을 위해선 서로 제대로 된 질문을 해야 한단다.

김연경 신인감독이 선수에게 말한다.

솔루션을 찾으라고, 대답만 하지 말고 물어봐라. 정말 모르는 거 없어?


그 하나하나가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어떤 영상에선 깊은 반성을 하고, 어떤 영상에서는 이건 꼭 같이 봐야 한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랬다간 진상이 될까 봐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십 년 전, 삼차나 사차 정도의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노라면 모든 본부에서 술자리를 하다가 살아남은 자들끼리 만나는 술집이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들었던 주옥같은 얘기들과 흡사하다. 그땐 술 먹으면 저렇게 진지한 얘기가 나오다 보다. 좋은 얘긴데 더 재밌는 얘기는 없나. 지루함에 하품을 했는데, 이젠 그 한마디가 그렇게 위로가 된다.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구나. 어디선가 누군가도 나처럼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는구나. 중원에 숨어있는 고수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건 그 아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동이 트기도 전에 집에서 나선다. 재택을 하는 특성상 꼭 만나야 하는 협의가 있으면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항상 그 전날밤은 잠이 쉬이 들지 못한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다. 지난주 공모전은 규모도 작고 나름 계획안에 자신이 있었는데, 마지막 결선 투표까지도 그렇게 긴장이 되더라.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가끔 너무 당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다 보면 꼭 삐끗하는 순간이 오더라. 어쩌면 불안함을 잠재우는 나만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자신 없는 마음을 포장하는 것일지도.


특히나 오랜만의 출장길엔 시동을 켜고 혼자서 운전을 하는 순간조차도 겁이 난다. 유라시아 횡단도 했던 애가 아직도 그렇게 무섭냐고 남편이 나를 놀려댄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 작은 순간 하나의 긴장도 차곡차곡 모아 기대감과 설렘으로 바꾼다. 어쩌면 오늘 생각보다 더 잘될지도 몰라. 아니면 망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오만가지 상상을 한다. 가상의 시나리오 속에 항상 한두 가지 정도는 들어맞는다. 그래서인지 협의 때 나의 말은 마치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항상 끊김이 없다. 그리고 협의를 마치고 나오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오늘도 나의 구멍은 들키지 않았구나.


중원의 숨은 고수는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제는 웬만한 상황을 겪을 만큼 다 겪어서 당황할 일이 많지 않아서 되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암초는 있는 법, 오늘의 감독관은 어떤 질문으로 나를 당황시킬까.

설레면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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