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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r 14. 2017

곱게 늙기.

아무도 가르쳐 준 적 없고,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는것들.

곱게 늙어야 해.


근래 티브이를 보면서 자주 내뱉는 말이다. 그러나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다. 이제는 누군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해서 하는 말이어야 한다. 


직장인에게 나이란 직급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능력과 상관없이 나이는 지위와 어울려야만 하고 그렇지 않은 두 부류에게 쏟아지는 것은 찬사 아니면 무시이다. 당연하게도 한 부류는 능력을 인정받아 혹은 핏줄을 인정받아 높이 나는 새이고 남은 한 부류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낭떠러지에서 안간힘을 쓰는 날개 꺽힌 새이다. 그저 고만고만하게 평균적으로 살고 싶은 수많은 직장인들은 날개 꺽힌 새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피 터지게 경쟁한다. 누군가의 우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성취가 아니다. 생존이다. 먼저 나는 새가 먼저 떨어진다는 말로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티다 보면 돌아오는 시선의 대부분은 이제 그만 퇴장해주길 바라는 후배들과 안타깝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선배와 동료들 뿐이다. 


직장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에서 나보다 어린 그리고 늙은 사람들을 만난다. 어린 친구들에게선 나의 과거가 보이고 늙은 친구들에게선 나의 미래를 본다. 나는 다르다고 믿고 싶지만 한국이라는 범주에서 거창한 배경과 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고만고만한 우리이다. 누군가는 나보다 더 많은 부을 가지고 더 큰 집에서 더 큰 행복을 가졌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나보다 가난하여 더 작고 허름한 집에서 불행 속에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서로의 삶을 다 보이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행복, 불행, 자신감, 불안함 등의 감정 또한 그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고만고만한 것임을 이제는 알겠다. 힐끔거리며 관찰하지 않아도 내가 어렸던 그때의 불안함, 늙어서 갖게 될 여유와 후회가 보인다. 직장을 벗어났지만 이 사회 안이라면 어느 곳이든 우리 모두는 엉켜있다. 


20보다는 40이 더 가까운 나의 나이. 

저는 27살이에요. 언니는 몇 살이에요?

응, 35이에요. 

우와, (놀라며....... 그리곤 진심으로) 미안해요. 생각보다 동안이시네요.

나도 내 나이에 놀래요. 

'왜 여기서 나와 함께 배울까.' 궁금해하는 귀여운 아가씨들의 눈동자 속에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인다. 나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월급을 받으며 내 청춘이 불타올랐던 그때, 나에겐 40대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지금도 내게 멀게만 느껴지는 40보다 그녀들이 내게 느끼는 거리가 더 멀 것이다. 그만큼의 차이는 배우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욕심을 덜 내고 열정이 사그라든 나이 든 나는 빠르게 멀리 가기보다 내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 열정에 가득 차 반짝이는 그녀들에게선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성공에의 열망과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건강한 욕심이 보인다. 


나는 알고 있다. 직장에서 나이 먹으며 이제 갓 세상에 뛰어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미 소진해버렸음을. 그리고 그 사실이 그렇게 아까운 것만은 아님을. 


젊고 어린 사원, 애매하게 나이 든 실장, 늙고 현명한 소장. 열정에 기대는 나이를 지나 숙련된 기술자에서 완숙의 지휘자가 되는 것은 어느 분야든 일정하게 올라가는 단계이다. 여기서의 비애는 누구나 같은 기울기를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그래프는 어느 순간 꺽히고 멈춰 평행선을 달린다. 진급, 승진의 시스템은 끝까지 올라가는 기울기가 당연하다고만 말할 뿐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감춘다. 올라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이들은 낙오자 내지는 자리 차지하는 뒷방 늙은이가 되버린다. 최근에는 뒷방 젊은이도 있다. 처음부터 그 시스템은 모두에게 같은 기울기를 줄 수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당연한 현상임에도 우리는 좌절한다.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실패라고 생각한다.


열정으로 돌도 씹어 먹는 청년, 사회에 부대끼며 적절히 타협하는 중년, 황금기일지도 모르는 대우받는 말년, 그리고 은퇴. 누구나 기대하는 삶이지만 이제는 누구나 누릴 수 없다. 적어도 직장을 다닌다면 말이다. 스스로 회사를 세운다면 망하지 않는 이상 잘릴 일이 없지만 직장인은 항상 올라가지 않는 이상 후퇴라는 이름 아래 무시받는 '만년대리,팀장,과장,소장'이 된다. 그 수는 올라가는 이보다 항상 많다. 공무원 세상에서 없는 것 같지만 진급, 승진의 시스템과 나이에 걸맞은 지위를 얘기하는 고정관념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호봉의 제도는 경제적인 격차를 줄여줄 뿐이다. 


내 아버지는 누구나 한다는 교감, 교장을 하지 못하고 평교사로 은퇴하셨다. 사람들은 교사의 끝이 평교사인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 누구나 하는 점수 쌓기에 실패한 내 아버지는 사실, 점수 쌓기를 거부하신 분이다. 안했다와 못했다의 차이를 자격지심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 차이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자식들의 타이틀이 부모이기에 속으로 미안해하셨다. 그렇지만 내 아버지가 평교사로 은퇴하시며 단 한 번의 접대를 하지 않으셨고, 평가를 하는 그 누구에게도 청탁을 하지 않으셨으며, 더 빨리 달리는 후배들을 부러워지 않으셨기에 나는 자랑스럽다. 그 속에 감쳐둔 속상함이 있으실진 모르지만 그 묵묵한 세월에 존경을 표한다. 


내게 더 빨리 달려서 얻어지는 성취감은 나보다 늦은 선배의 뒷모습에 비쳐져 경쟁적인 속물이 된 기분을 선사하였다. 회사에서의 모든 성취감이 왜 기쁜지를 들여다보면 나 또한 회사의 시스템에 의한 성취감의 노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입 연수원 때 함께 잘해보자 웃었던 동기들도 누군가의 승진과 대다수의 누락 앞에선 기분 좋게 웃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경쟁의 시스템은 누군가를 덜 효율적이고 덜 생산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무한대로 성장할 것만 같던 세상은 멈췄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직장, 회사는 느리게 변한다. 국가는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제도와 정규, 비정규직의 구분을 통한 이간질로 더 느리게 변해도 되는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다.


능력에 맞춰 연봉을 받거나, 연륜에 맞춰 호봉을 받거나 우리는 모두 나이에 걸맞은 직급, 지위, 경제력 그 모든 갖춰야 할 것들에 매여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고 싶다. 그래도 잘 살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싶다. 방법은 모르겠다. 돈도 벌면서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고 회사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 나이 먹도록 할 줄 아는 건 시험에서 점수 잘 받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승진에서 누락하지 않도록 평가 관리하는 법이다. 


나이 먹는다는 건 더 많은 경험으로 현명한 지혜를 가지는 것이라고, 내년에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꺼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나이를 먹으며 경험한 그 모든 것은 세상이 내게 준 어떤 역할 안에서 무리 없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내가 젊음을 소진하며 맞바꾼 연륜은 내가 꿈꾸는 삶에는 어쩌면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일구어 왔다. 불평등하다 옳지 못하다 뭔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게 다 내가 일군 것이다. 못하는 이에게 덜 받아야 된다고 얘기하고 잘하는 이에게 성공과 부를 약속하는 세상이 아닌 잘하는 게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에 내가 일조하고 있음을 알았다.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지금, 백수시절부터라도 다르게 나이 먹음을 실천해야겠다. 여전히 어떻게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어디서 유턴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운 저 노을이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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