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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r 29. 2017

자아성찰

30년 넘게 잘못 알고 있던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밝고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사람. 지는 것을 싫어해서 못하는 것은 아예 시도조차 안 하고 성공할 것 같은 길만 선택하는 본능을 타고 난 사람이라 믿었다. 그렇게 뭐든지 잘하는 강한 성격을 가진 센 여자로 살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지고 들어가서는 안 될 때는 꼿꼿이 버텨서 독한 년이란 말을 들었다. 때론 울어서 얻어내야 할 순간이 닥쳐오면 영악하게 여자로서의 이득을 최대한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20대를 지나고 30대에 접어들며 더 이상 나의 삶은 변화 없이 큰 파도 없이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 믿었다. 희망퇴직이라는 선택 전에는 말이다.


늦잠 자는 것도, 생각 없이 일단 걸리면 좋은 거지라는 마음으로 입사 원서를 넣는 것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다.  이제 넉 달을 넘어섰다. 몇 달 지나면 불안해하며 금방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고 과연 나는 백수 적성이 맞을지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놀고먹는 나와 신랑, 단 둘 뿐이지만 가족을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살림을 하는 일은 늘 완벽하지 않다. 오늘 했어야 하는 일들은 놀고 있음에도 밀린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지니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나던 어지러운 집안 살림을 오히려 더 대충 넘어가게 된다.  대한민국 전문직 직장여성들이 다 하고 있는 슈퍼우먼을 꿈꿨던 적도 있었기에 살림도 척척 잘하는 멋진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아무도 내게 살림을 잘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쉬게 되면 적어도 살림 실력만은 늘거라 생각했다. 막상 살림만 해도 되는 백수가 되니 욕심이 사그라든다. 한없이 게을러지는 나는 편안해진다. 내일 당장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모든 일은 바쁘지가 않다. 여유가 넘쳐나는 나는 모든 것에 관대해진다. 그동안 발을 동동거리며 완벽한 아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코스프레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욕심이었던 걸까.


그동안 쭈욱 해오던 요가를 좀 더 제대로 배우기 위한 교육을 듣는다. 알고만 있던 것들을 내 몸으로 구현해보고 싶었던 욕심과 이거라도 배워두면 놀고 있는 마음이 조금은 덜 무안할 것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8년의 직장생활에서 요가가 차지했던 시간은 생각해보면 일주일에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수련해왔다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요가는 그저 유연해지고 근력이 좋아지는 운동과 진짜 요가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서 머물렀을 뿐이었다. 깊이가 깊어질수록 내가 해왔던 많은 일들이 얼마나 작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별거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요가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별거 아닌 요가가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나의 취미생활은 정말 겉만 번지르르했던 것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콧대만 높은 까다로운 호갱에 불과한 요가원 수강생이었다.  


지난가을 신랑의 취미생활을 존중하고자 스쿠터를 타기 시작했다. 그저 신랑과 동네 마실이나 다닐까 했던 것이 여행 계획이 되고 지금은 2종 소형 면허를 딴 스크램블러 소유주가 되었다. 동네를 울리는 우렁찬 소리의 엔진음을 내는 저 아이를 타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내가 매뉴얼 바이크를 타고 있다니. 당기면 나가는 스쿠터의 쉬운 맛 대신 복잡한 손놀림과 발놀림에 머리가 어지럽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그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20대를 나는 어떻게 보낸 것일까. 대학교 때 나는 뭘 하고 놀았던 것일까. 한참 나보다 어린 친구들의 바이크를 타는 재미로 가득한 블로그들을 찾아보게 된다. 나의 젊음은 무엇으로 소진된 것일까.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라는 마음과 인생이 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막연한 후회가 교차한다.


당연히 나는 직장을 잘리기 전까지는 내 발로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 믿었다. 당연히 모든 직장 여자들이 괴로워하면서도 해내는 엄마, 아내, 직장인, 며느리, 딸 이 모든 역할을 다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오랜 시간 운동해 왔기에 당연히 잘 할 거라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남편이 타는 거라면 몰라도 내가 오토바이를 탈 일은 없을 거라 말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백수이고, 실업급여로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매일 놀면서도 집안 살림은 완벽 해지는커녕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다. 잘할 거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아직은 부족한 것들 투성이고 하지 않을 꺼라 믿었던 일들에 어처구니없이 즐거움을 느끼며 도전하고 있다.


당연히 먹고 살아갈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 나는 오토바이나 타고 전공과는 상관없는 데다 실력조차 그리 빼어나지 못한 요가 지도자 교육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안 하면 평생직장을 찾아다니며 한 달의 시간을 한 달의 봉급과 맞바꾸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내 시간을 돈으로 바꾸지 않고 나를 위해 소비하며 살아보는 지금, 불안해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놀란다. 진즉 알았더라면 대학생활을 좀 더 다르게 보냈을 텐데, 전공을 살려 선택한 곳이 대기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후회는 지금 나에 대한 확신으로 변한다. 이렇게 즐겁게 걱정 없이 그동안 쌓아놓은 것을 소비해가며 좀 더 쉬어가기로.


우리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많은 도전과 실패를 거쳐야만 했다. 갈 수 있는 길들이 눈앞에 있어도 때론 다른 길을 가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며 '나'의 모든 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야 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자신을 알지 못한 채 사회에 나가서 흔들리고 있을 후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과거를 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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