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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pr 06. 2017

이직을 위한 퇴사.

막막한 길의 끝에 서 다시 바라봐야 할 때.

대학까지 나와서 일 안 하고 뭐해?

비싼 등록금 내고 공부시켰는데 변변찮은 직장 하나 못 구하니?

십년 전, 취업을 준비하며 듣게 될까 봐 내내 겁먹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듣게 될까 봐 겁먹게 되는 말이 생겼다.

막상 나가보니 지옥이지? 그러게 그냥 다니지. 뭐 얼마나 좋은 데를 갈라고.

역시 큰 회사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경쟁력이 없어.


왜 그만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경제적 이득과 전 회사의 비전, 나의 비전에 대해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란 힘들다. 이유란 게 아무리 늘어나 봤자 한마디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저 쉬고 싶었다. 일하고 싶지 않다. 생계를 짊어진 두 어깨에 아내와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 가장들과는 달리 나는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퇴사를 얘기하며 여기저기서 제2의 인생이라든지, 도전과 모험을 쉽게 얘기한다. 일단 던져보면 어떻게든 살아가질 거라고, 그런데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많다. 나는 적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선택한 것일 뿐, 누구나 가끔씩 쉬고 싶고 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직장을 다닐 수 밖에 없는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씁쓸함이 담겨진 '그러게 참아보지'라는 말에는 부러움도 섞여있다.


쉬는 기간이 숙성기에 접어들고 있다. 슬슬 늘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각오했던 일이긴 하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게을러지겠냐는 속삭임과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불안함이 공존한다. 대학 때의 전공을 살려 첫 직장을 선택했기에 9년의 시간 동안 무르익은 실력이 일 년 쉰다고 어디 도망가겠냐는 막연한 자신감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끈다. 전공과는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있는 학원들의 문을 두들긴다.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없다. 그저 나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순수한 학구열이다.


몇 살에 퇴사를 결심하든 다음 직장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연차가 낮으면 낮은대로 높으면 높은대로 재취업의 문은 까다롭다. 선택의 폭의 문제도 있지만 재취업자의 조건 역시 쉽지 않다. 퇴사를 했다는 것은 다시 비슷한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텐데, 그로 인해 걸러내야 할 조건이 더해진 셈이 되는 것이다.


학원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학업을 배우며 새로운 업으로의 변신을 꿈꾼다. 어쩌면 남들보다 늦은 선택이다.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실전을 쌓아온 이들이다. 때로는 학생들보다 어리신 분들도 있다. 아마도 그 직종의 비애를 겪을 만큼 겪은 후 강사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현실 업계 이야기를 들을 때면 모두가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선생님들의 눈에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로 뛰어들겠다고 준비하는 이들은 어떻게 보일까.


나와 비슷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교육을 받는 이도 있지만 아직 사회에 발을 딛지도 못했거나 혹시 잠시 몸 담았다 크게 데어 다른 길을 모색하기 전에 능력을 쌓고자 하는 어린 친구들도 있다. 컴퓨터를 다루는 학원에서 양옆에 앉은 어린 친구들의 학업 속도를 곁눈질로 살피곤 한다. 익숙하지 않은 자판을 두들기며 하나씩 따라가는 친구들은 확실히 일을 시켰을 때 답답할 것만 같은 예감이다. 학원에서 배우는 많은 것들이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배움이 바탕이 되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나 실제로는 부딪혀봐야 고수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학원에 앉아서 배우는 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부딪히는 것을 직장에서 혹은 대학 때의 프로젝트에서 끝내야 한다. 그렇게 나만의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국가가 제공하는 배움의 의도는 좋으나 과연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대선도 다가오고, 취업문제가 수면 위에서 계속 회자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전의 직장이 사라질 것이고 변화에 대응할 줄 아는 이가 부각될 거라 예언한다. 그 말은 지금 직장인들이 조금씩 더 떠밀려 나올 것이고 전문가 집단에서 살아남은  몇을 제외하고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칠 것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배우려는 이는 더 많아질 것이고 스스로 직장을 만들거나(창업하거나) 아예 새로운 업(스타트 업의 일원으로)으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도 어쩌면 그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자 다양한 배움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명한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는 관계로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걸어가며 전혀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에 도전하고 있다.  더 어린 나이에 도전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맨 땅에 헤딩해야 하는 재취업자의 실업자 생활은 나처럼 무모할 수밖에 없다.


오늘 누군가의 글에서 신중한 퇴사의 중요성과 이직하기 전에 그만두지 말라는 조언을 읽었다. 내가 그 조언을 들어서 지금과는 다르게 계획을 세우고 퇴사를 하고 또 다른 직장으로 옮겨 탄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 시간이 나에게 닥쳐오지 않았을까. 전혀 나의 전공, 이력과는 무관하게 혹은 조금의 연관성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일을 도전하기 위해 준비하고 내가 지금껏 쌓아온 경제력을 소비해야 하는 지금 이 시간은 지금 당장이 아니었더라도 조금 더 나이 들어서 내게 찾아왔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무엇은 내게 얼마나의 돈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리고 남은 인생 동안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 그리곤 아름다운 은퇴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내가 궁핍하지 않게 살아갈 정도로, 내 가족이 적어도 가난에 시름하지 않을 정도로 부를 쌓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퇴사가 문제가 아니듯, 지금 당장 이직이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보람차게 일하고 싶고 스스로를 낭비하고 싶지 않은 똑똑하고 현명한 직장인들, 아직 열일 할 수 있는 미래의 퇴사 예정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실업자들도 고민하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잠시 쉬어가며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짧은 시간이 여유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주며 생각의 늪에 빠지는 반면 직장인들은 그 생각조차 낭비라 느끼며 하루를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점일 것이다. 어차피 선택한 실업의 상태를 받아들인 실업자와는 달리 직장인들은 실업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스스로 그들은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


대학생 때 교수들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안식년' 이였다.  그리고 직장인 시절 유럽에서 살고 싶었던 이유는 긴 휴가였다. 일하면서 쉼을 기대하는 것은 마냥 놀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삶을 생각하며 꾸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휩쓸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돈 벌기에 몰두하기엔 그 돈의 가치는 내 삶의 시간에 비해 별 볼일이 없다. 조금은 더 여유롭게 우리 자신을 풀어줘야 한다. 조금은 더 작은 집에 살고, 조금은 더 싼 옷을 입고, 아이가 학원을 적게 하더라도 치열한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다시 직장인이 되더라도, 24시간이 모자라는 사장님이 되더라도, 실패만으로 점철된 가난한 삶을 살더라도 덜 후회하지 않을까.


나의 실업자 생활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될 때로 되라. 어차피 지금 나는 바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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