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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pr 15. 2017

백만 명 중 한 명. 그게 나.

신문에서 읽게 된 지금, 여기 나의 상황.

삼 개월째 백만 명 실업자 시대란다. 


오! 그중에 둘이나 우리 집에 산다. 집에 들어오는 수입은 나라에서 주는 실업급여가 전부이다. 나가는 돈은 월세와 기본 수도, 전기, 관리비와 식재료 및 기타 문화생활비까지 직장 다닐 때와 비교해서는 반이하이지만 실업급여로 막아내기 버겁긴 하다. 


우리 부부는 희망퇴직자이다. 자발적으로 손들고 대신 위로금으로 일 년 정도의 여유를 받았다. 놀고먹을 일 년이 될지 준비하는 일 년이 될지는 슬슬 분명해질 것이다. 지금으로선 절반의 농땡이와 절반의 준비 정도이다. 직장인이라면 꿈꾸지 못했을 수많은 도전들 가운데 신중하게 몇 가지를 골랐다. 오랜 시간 호갱 노릇 하던 요가를 진지하게 배워보기로 했고 부부 라이더로써 새로운 바이크를 타기로 했으며 브런치에 심심한 글들을 올리기로 했다. 


5개월째, 100일이 넘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직장인의 때를 벗은 우리 둘 뿐만은 아니다. 가족들도 서서히 놀고먹는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집안 곳곳에 변화가 생겼다. 주말이 돼서야 정리되던 신발장이 대표적이다. 매일 다른 옷차림에 신경 쓰며 장에 넣지 않고 한가득했던 신발들은 장에 들어간 채 나올 일이 없다. 깜장 구두부터 뾰족 빨강 구두까지, 다양한 직장인용 구두들은 휴업상태이다. 대신 운동화 한 켤레와 슬리퍼 한 짝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은 바이크용 신발까지 총 3켤레의 전성시대이다. 옷장은 더 심하다. 그토록 정장 바지에 비할쏘냐며 입고 다녔던 청바지도 정말 가끔 나오는 특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겨울 내내 코트 대신 잠바가 대신했고 청바지 대신 기모 레깅스와 운동복이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옷장 속의 이제는 입지 않을 아이템들을 골라서 전 직장의 동료에게 선물로 보냈다. 신랑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던 셔츠들은 이제 안녕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녀석은 티브이와 아이패드이다. 하루 종일 채널을 돌려가며 재방송되는 드라마와 영화들을 번갈아가며 본다. 그래도 가장 사랑받는 방송은 뉴스이다. 왜일까. 직장인일 때보다 백수인 지금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해 해박해진다. 어떤 놈이 나쁜 놈이고 어떤 녀석이 거짓말쟁이인지 가려낼 줄 알게 된다. 백수들은 사회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오니 보는 세상이 넓어진 것이다. 


청년실업자들, 이제 갓 사회에 나와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후배들 중에 하나가 남동생의 여자 친구이다. 어쩌면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와 최근에 긴 대화를 나누었다. 백수로써 제일 먼저 해줘야 할 조언은 좋은 직장에 기를 쓰고 들어가라여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한참을 얘기했던 건 그녀의 불안함에 기름을 끼얹는 말이었다. 불안함에 활활 불타서 영영 백수로 살지라도 쓸데없는 직장생활은 선택하지 말라고. 그녀는 탄탄한 직장이 없는 자신을 친구들과 비교해 불안해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말도 안 되는 조건의 직장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한다.  오랜 시간 직장인였던 나는 그녀의 생각을 지지한다. 누군가는 그런 청년들이 배부르다 생각하지만 나는 아니다. 좋은 직장이란 단순히 연봉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꼰대 문화, 선배들의 텃세 같은 것들로 가득 하 변하지 않는 조직문화 속에서는 순수한 백지 같던 사람들도 서서히 물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현실 속에서 변해가는 동기를 보는 것이나 유연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뒤로 처져버린 자신을 보는 것은 우울하다. 그건 마치 절대 변하지 않은 사회 속에 나만 다른 사람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다들 아무 문제없다고 이대로 하면 된다고 하는데 부적응자처럼 나 혼자 뭔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 그 말은 큰 위력이 있다. 그렇게가 어떻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니도 기를 쓰고 들어간 남들 부럽지 않은 이쪽 업계 탑 연봉이었지만 언젠가는 닥쳐오는 경력단절이나 육아를 생각하면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방황하는 것에 불안해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 언니도 불안하긴 하지. 그런데 지금 직장을 다시 구한다고 해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것 같아. 지금 너무 좋아. 그러니 당장 남들과 비교해서 안달하며 적은 연봉받으며 스트레스받지 말아. 일단 벌어놓은 거 아껴 쓰면서 좋은 일을 찾아봐. 연봉 많고 남들 좋다는 데 말고 너에게 좋은 일. 


정말 답답한 일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없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 단순히 청년, 나 같은 희망퇴직자의 의지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 회사를 다니며 가장 답답했던 것은 모두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며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매여있지 않으면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나 매여있으면 움츠러든다. 회사의 생존을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부터 아주 작고 사소한 비도덕적인 일까지 다양한 일들이 행해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대부분이 그렇게 산다. 적당히 내 것 챙겨가며 어쩔 수 없다는 상황에 옳지 않고 틀린 방향으로 일하곤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살아가면 된다. 최선을 기업에는 최대 이익이라 말한다. 기업에 고용된 직장인의 최선은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라 기업의 최선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직장인의 최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왜 직장인의 삶을 개인의 삶 위에 둘 수밖에 없는 걸까. 일을 잘하기에 앞서 투덜거리는 불만투성이의 신입사원들이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없으면서 대우만을 요구한다고 선배들은 투덜댄다. 그러나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일하는 법이 아니다.  쓸데없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 야근하며 일하는 척을 하는 법, 그걸 일한다고 착각하는 신념을 가르친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끝마치고, 정해진 연봉만큼의 일을 하는 각자의 위치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법, 그리고 퇴근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법을 알려주진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배워본 적이 없기에 가르칠 수 없고, 그렇게 살아본 적 없기에 그렇게 살아보겠다 선언하는 이를 두고 보지도 않는다. 


 나도 회사의 목표가 나의 목표, 회사의 생존이 나의 생존이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언젠가는 더 나은 회사가 되어 모두 좋은 사람인 것만큼 좋은 직장인이 될 거라고. 긴 망설임 끝에 결국 나왔지만 지금도 전 직장이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기에 후회는 없다. 내가 알던 좋은 선배들의 치사하고 구차한 생존 후일담을 듣다 보면 지친다. 왜 다들 변하는 걸까.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으로 그리고 고질적인 꼰대적인 마음을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그 답은 회사생활 안에 있었다. 주변이 모두 그렇게 변화하는 동안 서서히 물들어가는 나를 보며 여기서 버텨가며 변하지 않는 방법이 없겠구나. 결국 내가 나와야 하는 것이구나. 나와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반 백수인 것을 뭘 그렇게 나는 대단한 실장님으로 살려고 했던 걸까.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들이 많다. 


백만 명의 넘는 실직자 중에 한 명, 바로 나이다.  어쨌든 백만 명의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되면서도 서글프다. 무직도 직장이다.  열심히 살아가고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들을 그저 놀고 있는 낙오자라고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속도를 조절할 권리가 있다. 때론 그게 사회의 요구, 가족의 기대를 무너뜨릴지라도, 한참을 뒤돌아서 가야 할지라도 자신의 선택이기에 책임도 자신이 진다. 그러니 백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걱정과 우려를 보내기보다 우리 안에 다른 삶의 형태로 바라보자.  이렇게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저들은 직장 잡을 생각도 안 하고 놀면서 실업급여 타낸다는 빈정대는 시선 대신 엄청난 불안함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선택을 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에 대한 격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실업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삶의 어떤 상황 중에 하나이다. 국가가 그것을 책임져주지 못하고 사회가 방관하는 사이에 백만 명을 넘어선 그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얻는 것을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기보단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힘겨운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실업의 시간=낙오자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 지금 내 모습이 비록 매일 운동복에 노메이크업에 나이 든 언니의 늦은 공부로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펼져칠 내 미래를 위해 언젠가는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실업이 벼슬은 아니지만 잘못된 것도 아니다. 부족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러니 백만 명이나 있는 실업자들, 백수들에게 박수를 쳐주자. 용감하게 직장을 박차고 나온 중년의 실업자들부터 미래의 직업을 쉽게 결정짓지 못하고 일 년씩 떠돌아다니는 유목하는 청년들까지, 각자의 노력이 최고의 결실로 맺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정부의 빵빵한 지원금(일어날 수 있을까 싶긴 하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눠야 하는 모두의 책임이다. 


힘내자. 백수!

(약간 오글거리지만 왠지 외쳐야할 것만 같았다.진짜 힘내서 직장다닐 때보다 더 행복한 백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외롭게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느끼겠지만 무려 백만 명의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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