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nA May 03. 2017

여유가 사치라고 말하지 마라

백수가 백수답기 위해서 

저 백수예요. 

 그게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나, 자랑하는 거다. 일할만큼 일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자랑이다.

실업급여 받아요. 

구 년 동안 보험금 냈다. 그동안 누군가가 받았을 실업급여가 이번에는 내 차례일 뿐이다. 그러니 마치 직장인들의 고혈을 내가 부당하게 얻어먹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달라. 나도 한때는 직장인이었다.

지금 쉬고 있어요. 

그러려고 그만둔 거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열심히 사는 것에 쉬는 것도 포함이다. 

맞아요. 놀고 있어요.

지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철없을 때, 아직 보살펴야 하는 아기가 없을 때, 놀아야겠다. 그러니 옛날 옛적 일하느라 힘들었던 젊은 날을 내게 권유하지 마시라. 나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할 거다. 뭐든 할 거다. 뭐 계속 놀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다시 일할 날을 꿈 꾸고 있다.


백수=나는 여유롭다. 어떻게 보면 직장인 시절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채워 넣느라 정신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장 집중해서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에.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할 것만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쉬게 되면 여행 갈 거라든지, 배우고 싶은 것들을 계획 세워서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갈 것 등은 부가적인 선택사항이다. 


나는 백수답게 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배우는 시간만큼은 집중하겠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쫓기듯 재취업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요가 지도자 과정도, 글을 써보겠다는 자그마한 소망도, 바이크를 타보겠다는 것도 백수답게 보내기로 한 이 시간의 옵션일 뿐이다. 


거대한 꿈을 꾸고 엄청난 사업을 계획하는 것은 아직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하루를 쓸데없이 소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면 불안해진다. 그 불안함을 이겨내고 내 인생의 정점일지도 모는 30대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드러누워본다. 진정한 백수의 길이란 이런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나의 상황을 부러워한다. 한편으론 어떻게 살 건지 궁금해한다. 사실 나도 궁금하다. 지금껏 계획하며 잘 살아왔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무계획의 미래가 성공일지 실패일지 너무 궁금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하다가도 까짓 거 이렇게 못살건 뭐냐며 욱하기도 한다. 직장인으로 시작했기에 은퇴하는 날까지 월급쟁이로 살아가며 일주일에 이틀, 일 년에 십여 일의 휴가를 기다리며 살아야만 하는 건 너무 슬프다. 그래 봤자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함을 안아야 하고 진짜 잘 돼서 평생직장을 고른다 한들 고층 건물 사이에 어느 한 건물의 몇 층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일 좋은 케이스 아닌가. 


정신없이 앞만 보며 돈 벌어 노년에 행복하고 자식들 잘 키워내는 것. 

그 평범한 꿈, 잠시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백수에게 여유는 필수다. 앞날의 고민, 치열한 공부, 자격증으로 스펙 쌓기는 여유에게 양보하자. 잠시 인생의 틈을 좀 주자. 누군가는 논다고 뭐라 하고 투지가 없다고 꾸지람할 것이다. 실패한 사람처럼 아무 계획 없이 사는 낙오자 취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청 열심히 노력한다고 지금 당장 예전의 직장인의 삶과 다를 바 없는 과거로 돌아가지 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결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는 한 듣기 싫은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여유는 남이 주는 게 아니다. 내가 갖는 것이다. 남들이 엄지 척하는 좋은 회사 다닐 때도 불안해하며 못 가졌던 시간이다. 절망의 바닥을 쳐야며 힘들게 노력해야 열심히 산다고 칭찬받는 건 너무 가혹하다. 기왕 놀게 된 거 생각 없이 좀 쉬어본다는데 그게 인생을 낭비하는 철없는 일인가. 이해받지 못할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 일인가.


사랑도 해 본 사람이 줄 수 있다. 잠시 쉬어도 보고 바닥까지 자존감이 땅에 떨어져 본 사람이 그 깊이를 알고 위로할 줄 안다. 그러니 가까스로 그 불안함과 싸우며 오늘 하루 생각 없이 쉬어가는 백수들에게 쉽게 조언하지 말자. 


선거철의 수많은 공약 들 속에 노동자, 여성, 청년 실업이 거론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으니 기회를 주겠다는 공약들이 많다.  출발의 불평등을 얘기하며 엄청난 도움을 줄 것처럼 부풀린다. 중요한 건 기회가 아니다. 이미 삐뚤어진 노동시장을 돌려놓지 않고 그 삐뚤어진 시장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건 노 땡큐다. 


그러니 기회를 잡기 위한 노력하라고 백수들에게 열심히 살라는 얘기는 다시 한번 열심히 이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이다. 나는 구 년이란 시간을 좋은 회사(돈 많이 주는 회사, 임원들이 다니기 너무 훌륭한 회사, 빽이 난무하고 보이지 않는 끈들로 서로를 이끌어주는 파벌 있는 회사, 갑에게 갑질 당한 것만큼 을에게 더 엄청난 갑인 회사)에서 보냈다. 어쩌면 돌고 돌아 다시 좋은 회사로 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백수로서 하루를 살아갈 때만큼은 내 식대로 보낼 것이다. 


백수에게 여유는 생존의 이유이다. 노력, 고민, 성찰, 공부 기타 등등 살아가는 동안 열심히 해왔던 모든 것들을 뒤로 잠시 밀어 넣자. 게을러질 수 있는 순간조차도 노심초사하며 즐겁지 않게 벌벌 떨지 말자. 무언가 되고 싶은 생각으로 끓임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달려온 시간들을 뒤로 보내고 오늘, 내일, 백수가 끝나는 그날까지 한 발자국만 여유를 가지자. 


오늘 아침, 요가 수련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과 어서 빨리 뭔가를 이뤄내야 할 것 같은 불안함이 백수의 여유를 잠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유롭게 즐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이럴진대 백만 명이 넘는 다른 백수들의 삶을 어떻겠는가. 그 모든 백수들에게 치열하게 여유를 찾으라고, 당당하게 가슴 펴고 백수답게 살아가자고 외쳐본다. 


한때는 가슴 뜨겁게 강남 한복판에서 야근에 철야에 눈물바람 하던 때가 나도 있었다. 


백수에게 여유는 사치가 아니다. 어쩌면 버텨내야 하는 이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도 화르륵 타오르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타다 남은 재가 되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기술 가진 전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