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딸이 둘인데, 둘은 한 배에서 나고 자랐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매우 다르다. 첫째는 초등 입학날부터 전교 임원이 되는 것이 앞으로의 6년의 초등 생활의 목표가 될 것이고 꼭 이루고 말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로 리더십도 있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곡절이 많은 둘째의 사교 생활과는 다르게 친구 사귀는 것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학원 친구도 많고 방과 후 활동으로 특별한 친구가 된 경우도 많았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얼굴이 쉽게 붉어지는 홍조증이 있어 '루피'라는 별명이 생겨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아이가 2학년 때 곧 반장 선거가 반에서 있을 거라 했을 때에도 나는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일단 내가 반장 경험이 전혀 없다 보니 한 반의 장이란 것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에게 반장 연설을 조금 시켜보니 이야기를 조리 있게 하진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연설문을 간결하게 적고 많이 연습해 조금 암기해서 정말 편하게 말하듯이 한다면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첨언만 했을 뿐.
그래도 아이는 나에게 전혀 첨삭 요청도 없이 삐뚤빼뚤 무언가 써서 갔고 놀랍게도 회장으로 선출이 된 것이다. 아이가 좋아서 하교 전 전화로 전해준 소식에도 나는 기쁨보다는 아니 널 왜....?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아이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도움이 필요하거나 난처한 상황의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따뜻한 성품이지만 한편으로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간과했던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3, 4학년때는 부회장을 맡으며 나름의 노력을 계속해왔고 작년 겨울방학 때 드디어 전교 부회장 선거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전교 임원은 학부모도 서약서를 한 장 써서 내야 한다. 학부모는 어떤 경로든 아이의 선거에 영향을 줄만한 선거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연설문도 학교 방송실에서 전 학년 교실로 송출되는 영상으로 그 스케일이 커진다. 오로지 선거 운동은 학교 게시판에 게시될 포스터 한 장,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두 명이 들 피켓 두 개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현수막, 포토카드는 너무 과열되고 과도한 쓰레기들로 전면 금지되었다고 한다.)
포스터나 피켓은 업체로 제작은 지양할 것, 가급적 손으로만 작업할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나로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 나는 손재주가 없는 엄마고, 그리고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 몰래 이것들만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를 호기심에 검색했다. 내 예상과 달리 업체는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끝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그리고 엄청 많았다.
도저히 시간도 없고 잘할 자신은 더 없어서 결국 업체로 연락을 했다. 몇 가지 도안을 보여주시며 색상, 같이 첨부할 사진이나 배경, 분위기, 글꼴까지 원하는 대로 가능하단다.
"그런데 저희 학교는 손으로만 제작하라셔서요..."
"아, 어머니, 당연히 손글씨 제작도 가능하세요. 다만 가격이 조금 더 추가되십니다~ 안 그래도 손제작을 요청하는 곳이 많아서 저희도 시안이 더 있습니다..."
나 같은 학부모는 일도 아니라는 듯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업체는 설명했다. 이래저래 제법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 후 피켓과 포스터를 받아 들었다. 그래, 우리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는데 이깟 비용쯤이야.,.
아이는 친구들과 추운 날씨에도 목이 터져라 본인을 찍어달라, 본인이 부회장에 적임자라고 외쳤다. 나는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 자리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거 기간 내내 오히려 선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선거 당일 아침까지도 5분의 1의 가능성이 있는 그 자리의 주인공으로 대해주었던 것 같다. 적당히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그게 혹시나 낙선할 때의 충격감을 줄여줄 거라 믿으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 같다. 뭐 딱히 정성을 들인 적도 포스터 만들며 한 거라곤 색상, 글의 배치 정도였으면서 기대 한 조각은 계속 쥐고 있었나 보다. 아이는 오히려 덤덤하게 낙선소식을 전했다. 그래, 우리에겐 준비 기간도 짧았고 또... 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되면 어때 이랬으면서 왜 우리 딸 안 뽑아줬을까 예민한 엄마는 극성스럽게 복기해 봤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놀라울 만큼 이유는 하나였다. 진심으로 이 선거를 임했는가? 5년간 열심히 학교 다니며 이때만을 기다려왔다기엔 우리는 어떤 컨셉으로 나를 선택해 달라 어필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때 유행하던 유행어를 대충 버무려 꾸역꾸역 제출할 '무언가'를 만들었던 거지. 그러고 나니 부끄러워졌다. 물론 간절해도 선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면 수없이 복기하며 그러지 말걸 하는 후회는 안 해도 됐겠지.
시간이 흘러 7월 중순에 2학기 전교 임원 선거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처음 다짐한 것은 이번에는 100퍼센트 손으로 직접 만들 것, 왜 전교 부회장이 되고 싶은지 다시 생각할 것, 그렇다면 어떤 전략으로 어떻게 유권자들을 설득할지도 생각해 보자는 것. 밤새도록 딸과 함께 연습장을 펼쳐 어떤 문구를 새길지 의견을 나누고 함께 필요한 것들을 샀다. 퇴근하고 밤늦게까지 작업을 했다. 하루 반을 투자해서 필요한 것들을 해냈다. 아이는 이번에는 꼭 당선돼서 학교와 학생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처음 보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래, 세상에 진짜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만은 우리 저번학기 때는 확실히 진짜는 아니었어. 이번에는 진짜 최선을 다했고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이젠 차분히 기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