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이라 아이들 신이 나 살 겸, 오랜만에 외출해서 지나가는 이들을 관찰하며 느낀 것. 나에게는 함께 사유할 가장 큰 친구가 사라졌구나 하는 것. 쇼핑도 수다도, 더 나아가 가끔 말다툼으로까지 번지곤 했던 우리만의 토론 시간도 영영 함께 할 수 없구나 하는 그런.
엄마와는 3년 정도 왕래 없이, 소식 없이 지내고 있다. 3년 전 봄쯤이었던 것 같다. 그녀도 나도, 이 무심한 세월도록 이렇게 지내게 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멀어지고 싶었었던 것 같다. 왕래 없는 처음 1년간은 속도 한결 편해지고 불편할 일도 거의 사라졌었다.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이 부모자식 간이라면 좀 다를까. 나는 어린 시절 내내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었다. 이렇게 다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또 내가 먼저 엄마 집에 내려가 엄마가 좋아하시는 것들을 늘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하면 엄마도 다시 곁을 내주시겠지. 내 친한 친구들처럼 그녀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 긴 시간을 켜켜이, 그녀는 나의 암마, 나는 그녀의 딸이면서 우리가 쌓은 것들은 행복한 추억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었다, 여섯 살 터울인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진.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는 나는 그녀가 손에 땀이 쥐도록 붙잡고 있던 풍선에서 끊어진 풍선 조각이 되어 훨훨 방임되어 멀어졌다. 남동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깡통 분유통에 해맑게 웃고 있는 아기 모델 좀 시켜보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걘, 엄마의 상당 부분이 달았고 밝고 강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갈망하고 필요했던 아들이었던 게 가장 그녀의 인생을 반전시켜 줬다.
이쁜 놈이 이쁜 짓하는 건지, 자라면서 박학다식한 그녀를 쏙 빼닮아 영리하고 강했다. 의사 표현이 분명한 그녀에겐 그야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리라.
20대 때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 지친 내가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니, '옛 말이 그른 것 같다, 열 손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데, 나에게는 안 아픈 손가락이 있다. 나에게는 아들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라는 말로 응수하던 그녀. 그러나 먼 훗날 그녀는 이런 말로 내 정신세계 근간까지 썩게 만들었던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강한 말을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내 내면 속 쿠션들로 어떻게든 막아보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상처의 원인들.. 그런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너무 깊어져서 마치 부부가 별거하듯 조금 거리를 두는 것도 지금의 우리 모녀에겐 필요하겠다 싶어 선택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3년이란 시간 동안 내가 곱씹었던 것은, 부스러기 같더라도 모으고 모으면 모일 줄 알았던 행복의 조각들이 아니라 불쑥 떠올라 나를 고통받게 하는 그녀의 욕설, 화난 얼굴, 폭력들이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드는 생각들, 내뱉게 되는 말들, 아이들에게 하는 모든 것들에서 조금도 그녀를 이해해 볼 만한 것은 없었다. 되려 '너는 절대 나 같은 애미 되지 마라'던 그녀의 저주 같은 한 마디에 부응하고자 나를 검열하고 나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 것이다.
여러 앞선 글 속에서처럼, 그녀는 무신경한 남편의 빈자리를 우리 남매로 메꾸려 했던 사람이었다. 내 정신세계의 기본 뿌리를 만든 사람이며, 어린 시절 독서광이었던 나의 모델도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이 쏟아부었다(그것이 오롯이 사랑이 아니었단 것이 슬프지만). 그녀와 사유하고 그녀의 남편, 시댁 푸념부터 늘 부족하다는 생활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이루지 못했다는 절망감까지 스펀지처럼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줄만 알고 흠뻑 젖어버렸다. 모든 시간이 늘 괴롭기만 하진 않았어도, 확실히 나는 긍정적인 결과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오늘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 특히 가족들을 보며 아, 나도 가끔 이런 이야길 엄마랑 같이 했었지, 이곳에 엄마랑도 자주 왔었는데 너무 많이 변했구나 하며 그녀와의 시간들을 추억했다. 하지만 영영 완벽하게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막연한 허탈감도 느껴진다. 어쩌면 남은 생을 다해 최선을 다해 지금을 해결해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외로움이 그녀와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해 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