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평범‘으로 포장하기
중학교에 입학하고 최대위기가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학기초에는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트고 조금씩 알아가는 시기이다.
담임선생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지만 사는 집은 왜 궁금하셨을까.
’가정방문상담‘
번호순서대로 하루에 2-3명씩 선생님은 집을 방문할거라고 하셨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무어라 핑계를 댈지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핑계거리가 핑글핑글 돌아갔다.
일단 내 번호까지는 며칠간 시간이 있었고, 나는 선생님이 다시 날짜를 잡기 어렵도록 내 차례가 되면 그때 핑계를 대기로 했다.
드디어 내 방문차례가 되었고, 나는 아침일찍부터 교무실로 찾아갔다.
최대한 거짓말로 보이지 않도록 덤덤하고 당당하게 말해야지. 다짐하면서 선생님앞에 섰다.
“선생님, 저 오늘 엄마가 일때문에 집에 안계셔서요..“
선생님은 특유의 자상한 미소를 지으시며 날 안심시키셨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버렸다.
“괜찮아~ 집안에만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거야. 오늘 같이 방문하는 친구들도 같이 가도 좋고.”
더 최악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우리집에 같이 온다고?
그것만은 절대 안돼. 선생님이 우리집을 방문하는것도 싫은데 이제 막 친해진 친구들이 온다는건 더더욱 끔찍했다.
우리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원룸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옆에 변기만 겨우 자리한 화장실이 있었고, 앞에는 침대와 화장대가 있었다.
멀리 앞에는 투명한 문으로 분리가 되어있는 아주 작게 딸려있는 부엌이 한눈에 보였다.
침대에 누우면 투명한 문으로 부엌에서 엄마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 시절 난 전세가 뭔지 월세가 뭔지. 몇평인지 따위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 집이 보통의 평범한 집이 아니란거는 알수 있었다.
내 앞번호 친구들의 집을 먼저 같이 방문하면서 점점 심장이 조여왔다.
혹시 나와 같은 집을 사는 친구들이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해보았지만, 친구들은 지극히 평범한 아파트였다.
좁거나 넓거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실과 부엌이 분리가 되고 방이 2개이상은 되는 가정의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평범한 집.
왜 나는 그런 평범함이 허락되지 않은걸까.
친구들은 거실을 따라 저마다 자신의 방을 선생님에게 소개했고, 나는 방을 둘러보면서도 홀로 저너머의 차원에서 둥둥 떠다니며 길을 헤메고 있었다.
앞번호의 친구들 상담이 끝나갈수록 초조해졌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너네 집도 같이 따라갈래!”
친구들은 이런 내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게 얘기했다.
뭐라고 변명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때의 기억이 댕강 잘려나갔다.
어찌되었건 나는 이상한 핑계를 대며 친구를 말렸으리라. 그래서 나는 선생님과 단둘이 우리집으로 향했다.
그때 우리집을 보던 선생님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문을 열자 선생님은 웃으며 들어오셨는데, 신발장과 집이 분리되지 않아 선생님은 처음에 신발을 신고 화장실쪽을 지나치셨다.
신발을 벗고 앞장선 내가 자연스레 선생님의 발로 시선이 옮겨질 때 선생님은 당황하시며 다급하게 신발을 벗으셨다.
”너 방은 어디야~?“
앞번의 친구들 가정방문상담을 갔을때처럼 친구들 방을 살폈던 선생님이 내방을 찾으셨다.
“이게 다에요”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애써 표정을 숨기시려는듯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셨다.
어떠한 말도 없으셨다.
내 기억속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다정하고 유머러스하시고,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하시는 좋은 분이셨다.
그때도 자신의 무의식적인 표정이나 말이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말을 아끼셨던거 같다.
몇분쯤이었을까.
1분도 길게만 느껴졌던 그 시간속에 선생님은 차분히 집을 살펴보고 나에게 무어라 질문을 하셨던거 같다.
‘엄마는 일하시고나면 몇시쯤에 오시니.’ 등과 같은 질문이었던거 같은데.
나에게 그때시간은 저 멀리 구석에 박혀 영영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한편으로 남아있다.
선생님은 다시 신발을 신고 잘보았다고 학교에서보자는 말과 함께 나가셨고, 난 그런 선생님을 문앞에서 인사드리며 숨을 돌렸다.
‘이제 끝났다.’
나에게는 크나큰 문제를 한 고비 넘긴 기분이었다.
그 원룸이라는 집으로 나를 평가받는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아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냈다는것에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들었다.
그 후로도 친구들이 우리집을 놀러가고 싶다고 할때마다 나는 여러 핑계를 대며 한사코 거절했고, 혹시나 친구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내가 원룸으로 들어가는걸 보고 소문이 나진 않을까.
하교후에는 집보다 먼거리로 돌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비상연락처를 확인해야한다며, 종이를 넘겨 확인하는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내 주소가 쓰여있었고, 집전화는 당연히 없어서 엄마의 핸드폰번호만 적혀있었다.
친구들이 내 주소와 연락처를 유심히 지켜보지 않기만을 바라며 빨리 그 종이가 넘어가 선생님에게로 돌아가기만을 바랬던적도 있다.
이런 종이를 돌리는 선생님이 마냥 원망스럽기만 했다.
추운날 따뜻하게 있을 수 있고, 더운날 더위를 식힐수 있고, 엄마랑 밥을 같이 먹고, 잠을 자고, 씻을수 있는 공간이면
그게 원룸이든 지하방이든 상관없지 않나.
난 그때 그게 왜이리 창피하고 숨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남들과 다르고 그 다름이 가난해서라는걸 나도 알고 친구들도 알것이다.
나는 비난받고 싶지도 동정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남들처럼 비슷비슷해보이고 싶었을뿐.
‘가난’으로 튀어보이고 싶지 않았을뿐이다.
반에서 꼴등을 해서 주목받는것보다 반에서 1등을 해서 주목받는게 훨씬 나은일이라는걸 누구나 아는것처럼.
적당히 외모를 가꾸고,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친구들과 밝게 어울리며 튀어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혹시나 내게 가난이 드러나보이지않게 ‘평범’을 포장하였다.
가난이 들키기 싫었던 어린 난 너무 철이 없었을까.
다시 돌아간다해도 난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을것이다. 지금의 친구들도 포장한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포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떤 포장을 해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