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형국 속, 새삼스럽게 어릴 적 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나네요
열한 살 어느 날이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어르신이 말했다. "고놈, 참.. 대통령감이네~허허" 조그마한 어린애가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게 기특해 보이신듯. 대통령이 뭔지 몰랐지만, 한동안 내 꿈은 대통령이었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통령이요"하고 말했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을 보는 게 재밌었다. 당시에는 분명 대통령을 얕잡아 본 것 같다. 학급에서 반장선거를 하듯이, 나라에서 뽑는 대표가 대통령이겠지, 그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내가 하겠소' 손들면 시켜주는 것처럼.
학급 반장은 손을 들면 되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반장선거, "반장 후보로 나올 사람~"하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손을 들었다. 자진해서 나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패기'가 아이들을 감동시켰는지, 난 비교적 쉽게 반장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회장 선거가 있었다. 6학년 반장들은 자동으로 후보가 되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전교의 임원들과 후보들은 한 교실에 모였다. 13명 후보들은 돌아가면서 '제가 회장이 된다면~'으로 시작하는 소견을 발표했고, 바로 투표가 이어졌다. 선거 운동이랄 것도 없었다.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에서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 유일하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건 '소견 발표'였다. 각 반에서 이미 임원으로 선출된 아이들이라서 다들 똘똘해 보였다.
첫 번째 후보가 말했다.
"제가 회장이 되면 쉬는 시간을 엄청나게 늘리겠습니다."
"와아~~!"
환호성이 터졌다.
두 번째 후보가 말했다.
"제가 회장이 되면 쉬는 시간을 엄청나게 늘리고, 체육시간도 늘리고, 간식도 엄청 배불리 먹게 하겠습니다."
"와 아아아~~!!!"
좀 더 큰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그 뒤에도 '한 장 받고, 두 장 더!'식의 빈 말 플레이는 이어졌고, 환호성이 점점 커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회장의 권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순수한 아이들의 '소원 놀이'. 아이들의 환호를 더 많이 끌어내기 위한 경쟁이 이어지면서, 뒤에 발표하는 후보들은 그야말로 똥줄이 탔다. 더 센 거, 더 센 거, 뭐라 해야 하나...
드디어 마지막 열세 번째, 내 차례였다.
"여러분, 빛과 소금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우리 곁에 늘 있지만 그 소중함을 우리는 간과.... 블라블라..."
언젠가 읽었던 '빛과 소금' 이야기를 늘어놨다. 유식해 보이지만 아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리 없는.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빛과 소금처럼, 드러나진 않지만 학교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 그런 식으로 얘기했던 것 같다. 진지 열매를 따먹은 연설에 성토 대회처럼 달아올랐던 선거 열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스스로만 뿌듯했던 그런 연설. 연설을 마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난 전형적인 내향형이다. 남들 앞에 서면 심장이 먼저 나대는.
어쨌든 연설을 마쳤다는 데 안심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회장 당선. 학생회장이 되었다. 후보 중에서 유일한 여자 후보였기에, 투표권을 지닌 여학생들은 대부분 나를 뽑은 듯했다. 연설이고 뭐고, 그냥 남녀로 갈린 싸움이었다. 열세 살 세상에서 남녀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이였으니. 여자애들이 보기에 남자애들은 그냥 '미개인'이었고, 남자애들이 보기에 여자애들은 '재수 없는 애들'이었다.
그야말로 '운 좋게' 회장이 되었지만, 회장으로서 뭔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학생회장은 학교 운영에 제안을 할 수는 있지만, 관여를 할 수는 없다는 점. 즉, 쉬는 시간을 늘리거나 체육시간을 늘리거나 간식의 양을 늘릴 권한은 없었다. '행복한 우리 학교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학교장에게 제출하기는 해도, 그게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학생회장은 운동회 개회식 때 앞에 나가서 대표로 선서를 하고, 조례 시간에 학생 대표로 '차렷, 경례!'를 하는 정도. 그게 다였다. 학생회장이라는 명예는 누렸으나, 대신 엄마가 '육성회비' 명목으로 학교에 돈을 더 냈으니(30년 전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학생 대표직.
3월 대선을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들의 공약이 연일 쏟아져 나온다. 말만 들으면 다 해결될 것 같다. 집값도 안정되고, 수도권 교통문제도 해소되고, 지역 불균형도 해소되고, 워킹맘의 자녀교육문제도 해결되고, 사회 불공평도 해결되고, 현재 불만도 다 사라질 것만 같다. 소위 '선거 뽕'이라고 하나, '후보가 하는 말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핑크빛 미래를 무작정 믿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정신 차리자.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모든 걸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독재시대가 아니다. 대선후보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여러 단체의 입장 차이 때문에, 정치적 계산 때문에, 권력 투쟁으로, 코로나19처럼 예상치 못한 여러 변수들로 인해, 혹은 권한 밖이라서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사는 게 변수 투성인데, 후보 시절 공약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대통령만 탓할 수도 없다.
대선후보들이 무조건 믿고 맡겨만 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믿을만한지 계속 의심하고 평가해달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공약의 허와 실을 잘 알고 있다고 겸손하게 말해주었음 한다. 대통령 권한이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래도 우리가 추구할 방향은 이런 거고, 이런 신념을 지켜가겠다는 진정성 있는 말이 오갔으면 좋겠다. 시원시원한 '환호성'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겠지만,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인 다짐이 '조용한 끄덕임'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