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나를 천천히 알아가 주기를 바라.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성급하면 일을 그르친다.
'급함의 미학'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급하게만 살려는 것 같다.
핸드폰을 켜고 소셜 미디어를 접속하면 10초만에 끝나는 쇼츠(shorts)형 콘텐츠, 한 줄짜리 정보, 사진 몇 장에 꾹꾹 눌러 담은 내 일상,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바쁘게 스며든 것 같다.
가끔은 배고프기 2시간 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때고, 따로 가마솥 물에 쌀을 넉넉히 넣고 불려 30분간 불을 세심하게 부채질하고 조절해가며 뜸 들여 갓 푼 고슬고슬한 밥과 그 밥상 위로 오가는 푸근하고 정감 있는 가족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나는 늘 이런 느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치가 없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있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중고 시장 플랫폼에서 '희귀 10원짜리 동전'에 엄청난 가치를 붙여 파는 것을 보았다. 10만 원짜리 10원 동전과 같은 어불성설이 또 있을까.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다. 시간이 지나는 것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물건과 같이 사고팔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음식을 한다는 것, 시간을 들여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 그 모든 것에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소중함이 깃든다.
MBTI 성격 유형 검사가 부쩍 유행이었고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한 번은 오가는 대화인 것 같다. "너는 MBTI 유형이 뭐야?" 나는 늘 성실하게 대답한다. "INFJ"라며.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다. 어떤 이는 그때부터 나의 모든 행동이나 말을 나의 MBTI 유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그 시점부터 조금 불편해지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을 상대방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시간을 투자해서 공감하며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며 관계를 조금씩 진전시키려는 노력과 정성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워진다. 물론 그 질문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나는 모든 인간관계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시간의 콘텐츠를 족집게식으로 3줄 요약하듯, 한 사람의 성격과 그 마음의 깊이를 16개 조합의 알파벳 4개와 단 몇 줄의 설명으로는 형용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 물론 앞으로도 나는 MBTI를 관계 초기에 내게 묻는 이들에게 성실하게 내 유형을 알려줄 것이다. 묻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색했던 분위기를 녹일 수 있는 좋은 대화 소재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나를 'INFJ' 유형이라는 좁은 상자 속에 비좁게 눌러 담으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하게 생각할 것 같다.
역시나 나는 느린 것이 좋더라. 특히나 인간관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