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으면서 누군가의 어렸을 적 일기장을 소설로 정리한 느낌을 받았다. 소설에 나오는 화자인 ‘스카웃’이 저자 하퍼 리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처음 앵무새 죽이기를 읽었을 때는 8년 전이다(막 군대에서 상병을 달았을 때이다). 세상에 인종차별이란 게 있다는 사실은 알고 남북전쟁은 금시초문이었던 내게도 이 책을 덮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고 들어왔다. 나는 감사한다. 앵무새 죽이기야 말로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는 책이다. 나는 그런 책을 독서를 처음 할 무렵에 무모하게나마 완주하였다.
8년 전에 분명하게 감명받았음에도 기억나는 것은 스카웃의 아버지가 멋있었다는 내용뿐이다. 그는 세상의 눈초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인간의 양심이라고 말하며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을 변호한다. 그때도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당연한 일은 그때 당연한 일이 아니었구나. 당연한 게 당연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인간 혹은 여럿이 올바르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해야 하는구나.
8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보물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내가 오늘날까지 기억했던 스카웃의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한 내용은 이 소설의 핵심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뼈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다양성을 말한다. 그만큼 입체적인 캐릭터가 많이 나온다. 숲에서 생활을 하는 커닝햄 가족, 집에서 나오지 않는 은둔자 부 래들리, 그 시대에 흑인 혼혈아를 양산하는 레이먼드 씨,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에게 대놓고 깜둥이 애인이라고 하는 노망난 할머니, 심지어 흑인에게 강간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여인까지. 각각의 겉면을 거칠고 모났음에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인간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엉뚱한 장난에 웃고 지키지 못할 것은 애초에 시작도 안하며 고통에 저항하고 고독에 몸부림친다. 소설은 그것을 여러 인간에 담아 표현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인간에 담길 수 있는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문학을 읽는 이유이다. 여러 인간에게 나를 발견하고 하나의 인간에서 세상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나는 이 소설에서 하나의 문장을 꼽으라면 ‘흑인을 속이는 백인은 무엇이 되었든 쓰레기다.’라는 말이다. 그것은 스카웃의 아버지 입에서 나온다. 참고로 아버지는 소설에서 시종일관 현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실제로 내 눈에도 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나를 좀먹어가는 편견이란 것들로부터 해방된 인물에 가깝다. 그런 그가 무고한 흑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밥 유얼이라는 인간은 쓰레기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흑인은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고 노래만 부르는 무해한 앵무새이며 그 시대에 가장 낮은 부류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흑인을 속이는 백인은 쓰레기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앵무새를 죽이기는 용납받을 수 없는 행위다. 앵무새를 죽이는 자는 쓰레기다.’ 그러나 결국에 무고한 흑인은 죽게 된다. 그 시대에 흑인은 백인을 이길 수 없다. 밥 유얼은 백인이고, 무해하지만 누명을 쓴 흑인은 백인의 결정 아래 서 있다.
이 세계에도 계급이란 게 존재한다. 가장 위에 읍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숲에 사는 커닝햄 가문을 무시한다. 커닝햄은 쓰레기장에 사는 유얼 사람을 경멸한다. 유얼 사람들은 흑인을 짓밟으려고 한다. 이렇게 크게 네 부류가 있는 것이다. 읍내 사람들, 커닝햄 가문, 유얼 가문, 흑인들. 톰 로빈스라는 흑인에게 누명을 씌운 밥 유얼은 쓰레기장에 사는 백인이다. 그가 톰 로빈스가 자기의 딸을 강간했다고 증언한다. 실상은 집안에 갇혀 사는 밥 유얼의 딸이 자기의 일을 도와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톰 로빈스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다. 법정에서 스카웃의 아버지는 이 모든 걸 까발린다. 그러나 밥 유얼은 쓰레기장에 살아도 백인이다. 배심원들은 백인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승소하였다. 경멸은 밥 유얼의 것이었지만.
밥 유얼을 보면서 아큐정전이 생각났다. 무지한 인간은 타인의 경멸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더이상 떨어질 것 없던 평판마저도 잃게 된 밥 유얼이 최종으로 선택하는 것은 타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지는 인간은 결국 자신에게 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낮은 자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와 엄격한 차이를 두려고 했다는 점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지난 수천 년 간 그런 식으로 서로와 구분 짓고 살아왔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겨우 하나의 예시, 단위 면적당 멜라닌 색소의 밀도가 인격의 상하를 결정하는 사회를 어리석게 불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그럴지도 모른다.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이 아닌 전 세계에 수십억 장이 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들어간 종이 쪼가리 수량으로 인격의 우열을 정하는 예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나의 언어를 빌리니 앵무새 죽이기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학살하는 홀로 코스터 소설 같다. 이 소설은 마음 구석구석 따뜻하게 해주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을 더 말하고 싶다. 마을에 유일하게 지하실이 있는 어떤 아줌마가 지하실을 만들어놓고 남은 여생을 마을 아이들로부터 지하실을 지키는데 쓴 일화다. 그녀는 보청기를 꼈는데 할로윈 데이에 마을 아이들이 그녀가 잠든 밤에 집 안 가구들을 모두 지하실로 옮겨놓은 일화가 있다. 나는 이 일화에서 몸서리칠듯한 흐뭇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웃음 짓게 하는 에피소드들이 앵무새 죽이기에 가득하다. 꼭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