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by 홀론씨

사랑과 선택에 대하여.


이 책은 어째서 니체의 영혼회귀로 시작해서 서로가 아니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남녀의 사랑으로 끝을 맺는 걸까. 우리가 서로에게 유일할 수 없음에도 사랑하려 하고, 또 사랑하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욕망을 꼽으라면 ‘토마시에게 유일무이한 육체가 되려고 하는 테레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테레자는 토마시의 여성편력을 이해하려고 다른 남자와 동침도 해보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유일한 육체가 되지 못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원망하며 바라본다. 테레자는 본래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거울 앞에 서길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소설 속 인물의 선택은 탄탄한 과거에서 비롯된다. 테레자가 유일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토마시를 만나기 전 과거에 있다. 테레자는 문을 잠글 수 없는 화장실에서 계부의 야릇한 시선 받으며 몸을 씻어야 했던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어딘가 많이 어긋난 테레자의 친모는 테레자의 일기를 찾아내 아침 식사자리에 낭독했다. 테레자의 집은 몸과 생각의 사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고, 저자는 그곳을 집단수용소에 비유했다.

테레자는 집에서 벗어났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술집에 토마시가 방문했을 때 스스로 토마시에 대한 은유와 이미지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술주정뱅이들이 웨이트리스를 희롱하는 그곳에서 토마시는 정중했고, 테레자처럼 책을 끼고 있었다. 동화였다면 충분히 운명으로 가장할법한 만남이었지만, 저자는 대놓고 두 주인공의 만남을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져 벌어진 일이라 말했다. 토마시는 동료 대신 대타 출장을 왔고, 또 기차 시간 때문에 술집에서 시간을 죽여야 했고, 많은 술집 중에서 테레자가 일하는 술집에 들어섰다. 테레자도 본래 그 시간대에 일하지 않았어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만남은 단지 우연이다. 저자는 두 주인공이 꼭 서로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음을 은연중에 시사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 앞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그것은 손 씻을 시간이면 사라질 가벼운 향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테레자가 이 소설에서 무거움을 대표하는 인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테레자가 토마시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반면 토마시는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테레자를 맴돌지만 동시에 벗어나려 한다. 테레자 말고도 동시에 수많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려 한다.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갖겠다는 마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결국 테레자는 토마시가 약해지길 바란다. 가장 낮은 자리에 정착해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기를 원한다. 나는 이 부분이 아이러니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테레자가 무턱대고 짐을 싸서 토마시를 찾아갔던 가장 큰 동기는 토마시의 강인함이었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지적이면서 이성에게 매력 있고 인정받는 외과의사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거라 믿었을 것이다. 강해서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사랑한 후에 상대가 약해지길 바랐다. 사랑의 속성이 그런 것이라면, 사랑은 반복해서 냉탕과 온탕 사이에서 오가게 하며, 자신의 삶을 저울질하게 하는 고통의 원인일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강아지 한 마리 선물한다. 강아지의 이름은 카레닌. 저자는 소설 전반에서 카레닌의 삶과 죽음을 묘사하는데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할 만큼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카레닌에 대한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아직 오늘이 사라지지 않았음에 기뻐하듯 껑충 뛰어올라 테레자와 토마시가 잠든 침대로 올라간다.‘ 카레닌의 아침에 대한 묘사이다.

저자가 ‘카레닌‘이라는 인물(?)을 작중에 다른 조연들보다 많이 드러냈던 이유는 어떤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스스로 회수하려 했던 것 같다. 그 물음은 우리는 어째서 개를 사랑하는 것처럼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다.


소설에서 테레자는 자신의 월경은 수치스러워하면서 카레닌의 월경은 혐오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피를 흘리며 다니는 카레닌에게 기저귀를 입히며 자못 흐뭇해하는 제 모습에 의아해한다. 테레자가 그렇듯 사람은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무언가를 크게 바라지 않는다. 목욕하길 싫어하고 산책길에서 아무 데나 배설하면서 다른 개에게 시끄럽게 짖어대는 그들의 속성을 인간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자체 그대로에서 깊은 애정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이런 속성이 낙원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개의 시간 그래프는 시곗바늘처럼 24시간이 되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운동을 한다. 카레닌의 시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것이며, 영원회귀같이 계속 반복된다. 반면 인간의 시간은 ‘노정 없는 공백의 직선‘을 달린다. 저자는 마치 이 차이가 낙원에서 떨어진 인간이 받는 형벌처럼 묘사했다. 공백의 직선을 달리기 위해선 앞날을 모르면서도 선악을 구분 지어가며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떨어지던 날, 최초의 선택은 자기 몸에서 떨어진 똥을 더럽게 여겨 땅에 묻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몸은 어여삐 여겨 깨끗한 새하얀 변기 위에 올리고 똥은 보이지 않는 정화조로 흘려보내는 인간의 모습에 냉소를 보낸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육체와 똥을 구분 짓는 것. 그것이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선택해야 하는 형벌의 시초라고 저자는 말하려는 것 같다.


인간은 동반자를 구할 때 미리 저울을 준비한다. 그것을 나쁘다 말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정은 길고 험난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보증을 원하는 것은 당연히 인간적인 욕망이다. 그래서 대게 사람은 갓난아기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건져 올리는 대신 탄탄하고 우람한 유람선에 오른다. 그래야 속이 뒤집어지는 뱃멀미를 겪어도 무엇이 있을지 모를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나을 거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직선으로 뻗어가는 삶의 노정에서 인간은 항상 최선을 궁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대체 역사를 모르는 나 자신조차 오늘이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더 무겁다 말할 수 있기 위해선 천칭의 반대쪽에는 다른 선택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먼 옛날 하나였던 쪼개진 반쪽을 찾기 위해 사랑에 빠진다.’ 저자가 플라톤의 입을 빌려 한 말이다. 우리는 사랑에서도 이상향을 꿈꾼다. 그 형태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테레자와 토마시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과 이미지에 사로잡혀 가볍게 서로를 선택한 주인공들은 자신의 진짜 반쪽을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테레자와 토마시가 만나지 못한 소설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가벼운 선택에 의해 결국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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