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4)

당신의 이름은

by 홀론씨


저는 요즘 스스로를 ’당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 이인칭인 ‘너’라는 말을 사용했는데요. 아무래도 ‘너’라는 표현은 일상에서 친구를 만날 때 흔히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헷갈려서 잘 쓰지 않는 ‘당신’이라는 표현으로 제 몸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고(번뇌)의 말을 제 3자처럼 대할 수 있어서 관찰하기가 조금 더 쉬운 느낌입니다. 당신이 배고프구나, 당신이 화가 났구나, 당신은 이 자리를 뜨고 싶구나, 하는 식으로요.


제가 제 몸을 당신이라고 부르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 앞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전에 저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내면에 심오한 동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단순 계기는 회사에서 점심 먹고 두 시간 동안 입 터는 팀장의 인중을 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가슴 안에서 든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사람입니다. 팀장의 모습이 거슬린다는 건 제 안에도 그런 팀장의 면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가 그 대안이었습니다. 메크로처럼 입 터는 나이가 되기 전에 미리 내면을 드러낼 창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그때는 어떤 글을 쓸지 미리 정하고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면 내면을 드러내는데 분야나 장르는 상관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소설 영화 그림 드라마를 다 포함해서 콘텐츠라고 부르죠. 예전에는 어째서 ‘속에 든 것’, ‘내용물’이라는 content라는 말이 콘텐츠의 유래되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창작이란 대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역입니다.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상사가 부하직원 앞에서 배설하듯 꺼내는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지면이든 메모리든 혹은 문화로 정착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되는 그릇처럼 말이죠.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어째서 표현하려고 하는 걸까요? 지천에 범람하듯 만들어지는 이야기와 이미지, 또 거기에 재미를 느껴 비용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후대를 위한 정보 전달일까요? 그러기엔 인간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무에서 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게 아닐까 싶네요.




‘인류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궁금했습니다. 허블 망원경으로 둘러봐도 우주는 이렇게 광활하고 가혹한데, 어째서 지구에서만 지성체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것일까 하고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지성체가 탄생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기를 두들겼습니다.

그 결과값은 빅뱅 이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모습조차도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었죠.

우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는데요. 거기서 아주 작은 오차만 생겨도 우주의 팽창속도가 지금과 달라집니다. 너무 빨리 팽창하면 입자가 뭉치지 못해 행성이 없는 얼어붙은 우주가 되고, 너무 늦게 팽창하면 우주가 식기도 전에 다시 수축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탄생 확률조차 10의 마이너스 120승쯤 된다고 하는데, 거기에 더해 생명체가 탄생해서 지성체까지 진화하는 확률이 얼마나 작을지는 설명이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로또를 10주 연속으로 맞을 확률보다 작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로또라도 맞을 수 있게 설계된 걸까요? 그렇다고 하기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인류원리‘가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우주에 '우주의 탄생을 고민할 정도의 지성체'가 등장한 이유는 이미 버려진 복권종이만큼이나 많은 우주가 탄생했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게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중 하나쯤은 지성체를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죠. 당첨확률보다 사는 사람이 많아 거의 매주 로또 당첨자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1편에서 말했던 이중슬롯 실험도 그렇고 인류원리도 그렇고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다중우주는 실제할 수 있겠다는 강한 느낌이 드네요. 게다가 부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를 '여래'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즉 그렇게 같이 오신 분'쯤으로 해석됩니다. 불교 세계관에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나타나고 가르침이 이어지는 한 또 다른 부처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현생을 석가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스로 여래,라고 칭했던 이유는 ‘이전에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부처님들처럼‘ 그렇게 본인도 똑같이 왔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계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1만년 전이고, 사피엔스 이동은 7만년 전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아주 길게 잡아도 700만년입니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는 10의 50승은 족히 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부처가 1초에 한번 출현해도 모래알 수를 넘어서기는 불가능합니다. 다중우주가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다는 것이죠.


가끔씩 생명체를 낳지 못한 우주를 상상하곤 합니다. 그곳은 너무 빨리 팽창해서 행성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얼어붙은 공간이 전부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곳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빛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도 없고, 행성도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좌표와 시간도 없습니다. 그곳은 버려진 우주입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기 때문이죠. 과연 그곳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부터 지금의 가상현실까지,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타인이 들어와 머물기를 바라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간이 가진 특징 중에서 우주와 가장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주가 광활하고 무한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우주를 봐주는 작은 시선들 때문입니다.

칼세이건은 우리가 별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했었죠. 말을 하다 보니 저도 비슷한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우주가 자기 자신을 담은 그릇이자 콘텐츠라고요. 그리고 아집을 버리고 그 그릇에서 깨어나면 우리도 우주 그 자체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즘 하고 있는 명상을 설명하기 전에 사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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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퀘어. 김아타>


이 사진은 8시간동안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고 뉴욕 타임스퀘어의 정경을 찍은 사진입니다. 저는 이 사진에서 불교의 공사상과 우주의 마음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제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시간을 무한히 빠르게 재생시킵니다. 생각은 빛보다도 빠릅니다. 부모도 친구도 내 자신도 죽고, 지구도 태양도 우리 은하도 결국 사라집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흩어진 자리에 무엇이 남나요? 김아타 작가의 타임스퀘어 사진은 단 8시간으로 타임스퀘어를 지나던 행인들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홀로 남은 텅 빈 마지막 우주를 그릴 수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역지사지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했죠. ‘나’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상대적인 요소들, 부모, 자식, 배우자, 직장, 친구들,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모두 지우고 나면 우주의 가장자리 끝에서 텅 빈 공허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주가 자신을 알아줄 인간을 낳은 이유이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네 편의 글을 올렸는데요. 되돌아보니 명상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너무 장황하게 설명한 것 같네요.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제가 잘 까먹고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한답시고 방석을 깔고 앉아 눈을 감았지만 마음이 그리는 것들은 무언가 바라는 소망이었습니다. 편하고 부유하게 해달라거나 고통에서 멀어지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죠. 그것은 또 다른 집착을 만들고 새로운 고통을 불러왔습니다. 옛 성인들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처럼 말이죠.

그래서 양자역학과 불교 등 옛사람들의 지혜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 내 마음도 제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잠자기 전 팔굽혀펴기처럼 시작한 명상이었지만, 행복이란 앞으로 다가올 어떤 것이든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다다른 곳이 우주의 마음이 되는 명상이었습니다. 저는 분노에 휩싸이거나 마음이 들뜨게 되면 깜박이는 눈과 날숨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무한히 빨리 돌려서 저와 제가 살아가는 모든 세상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든 수용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주 조금이지만요.

제가 방금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다 말했었죠. 사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은 아주 쉬운 사실만 기억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열차를 기다리는 세상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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