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지 않기.
제가 저번에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눈이 운명을 거스르는 힘이자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힘이라 썼습니다. 불교에선 그것을 사띠,라고 부르는데요. 우리말로는 알아차림, 마음챙김, 깨어 있음, 자각으로 번역됩니다.
사띠가 이렇게 여러 말로 표현되는 이유는 아마 마음을 보는 행위를 손으로 콕 찝어서 가리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표현으로 부르는 게 아닐까 싶네요.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칫 후회를 합리화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려는 행위를 깨어있음(사띠)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보는 센서가 우리 몸에 하나쯤 달렸더라면 어땠을까요. 화가 나는 순간 색안경을 낀 것처럼 눈앞이 빨개지면 제 마음에 휩쓸려 살지 않을텐데 말이죠. 아쉽게도 오직 사띠만이 어둡고 풍랑이 몰아치는 마음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 빛이 너무 미약해서 금방 어둠속에 파묻힙니다. 그러나 마음의 힘도 근육처럼 쓰면 쓸수록 더 견고해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처럼 마음의 힘을 키울 때도 무엇보다 올바른 자세가 중요한데요. 저는 불교의 법이 마음 다루는 학문 중에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는 수행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승가에 며칠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8월이었습니다. 무덥고 습한 날씨였는데 절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승가에선 반바지를 입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항상 긴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는데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일과 시간이 끝난 후 방에 들어가도 해방감따위는 없습니다. 휴대전화도 티비도 없었고요. 절이 산에 있어서 아디다스 모기가 엄청 많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10시 전에는 잠을 자야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법문을 들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잠이 안 옵니다. 생활 리듬이 바뀐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허기가 져서 잠을 설칩니다. 오후불식이라고 해가 기울면 승가에선 음식을 주지 않거든요.
저야 단 며칠의 체험이었지만, 스님들은 출가 이후에 환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야채만 먹고, 주말이 와도 달콤한 늦잠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승가의 유래가 왜 ‘번뇌를 고문하는 자‘인지 확 이해가 갔습니다.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고 번뇌가 지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 그게 승가의 주된 업무입니다.
번뇌의 생멸을 지켜보는 일이 무상,고,무아를 깨닫는 방법이라고 부처님의 가르침이거든요.
무상,고,무아는 인생은 고통이고,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나라는 실체도 허상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쾌락도 순간이고, 인생은 유한하고, 사람은 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뻔한 말이죠. 아마 이런 말을 처음 들어본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말을 우리는 잊고 삽니다. 너무 흔한 말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집이 소멸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제가 최초의 생물을 상상해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세포모양도 갖추지 못한 풀잎에 맺힌 이슬에 가까운 모양일 것으로 떠올렸습니다. 아침에 떠오른 태양 아래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그런 모습말이죠. 사람은 그런 물의 속성을 가리켜 표면장력이라고 합니다. 외부와 닿는 면적을 최소한으로 해서 모양을 유지하려는 속성이죠. 그러다 결국 해가 높이 떠오르면 이슬은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말보다는 증발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리고 증기는 다시 맺혀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부처님은 실체하는 건 없고 모든 것이 작용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말한 물의 흐름처럼요. 그리고 인간은 물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표면장력같은 속성이 있지 않을까요.
부처님은 인간의 삶이 고된 이유는 탐,진,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수십가지의 이름을 붙이지만 마음의 속성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탐과 진이 있습니다. 탐은 무언가를 당기는 마음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고, 진은 분노, 질투, 혐오로 무언가를 없애거나 멀어지려는 마음입니다.
자석의 N극과 S극의 인력, 척력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탐, 진 모두 먹으려는 마음과 먹히지 않으려는 마음처럼 나를 지키려는 마음,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치’는 탐,진에 휩싸여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저는 만약 아침 이슬에게 자아가 있으면 어떨지 상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원망하면서 사라지는 자동차 보닛 위에 이슬을 상상하니 애석하면서도 웃펐습니다. 사람의 눈엔 이슬의 삶은 통근시간 조차 되지 않는 짧고 덧없는 삶이니까요. 그러다 그건 인간의 시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하루살이나 이슬로 태어났다면 죽을 날이 너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은 제각기 흐르니까, 하고요.
이제는 반대로 지구나 우주의 입장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지구의 수명은 대략 40억년쯤 됩니다. 코인이나 강남 집값때문에 몇십억이 현실적인 숫자처럼 되어버렸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아득한 수치입니다.
지금은 백세 시대이니까, 연봉 100원으로 45억을 모은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세대가 태어나야지 40억년을 메울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듯 우주의 시간 속에선 사람의 수명도 잠시 맺혔다 사라질 작용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살면서 마주하는 것들에 집착합니다. 탐진치가 아집을 형성하고, 아집은 이건 선하고 이건 악하다 구분짓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옳다고 목소리 높였던 것들은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남자라서 여자를 혐오하고, 내가 가난해서 부자를 욕하고, 한국에 태어나 일본을 비하하고, 오른쪽은 왼쪽을 외면하고, 아직 젊어서 늙은이들을 꼰대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죠.
아마 주위에서 나이 지긋하고 화가 많으신 분을 쉽게 찾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종업원이 음식만 늦게 갖다줘도 버럭하는 분들이죠. 대게 그런 분들은 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잘못됐다 말하십니다. 세상은 점점 멸망에 치닫는데 정작 다가올 자신의 죽음은 두려워하십니다. 잎새 이는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시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면 오랫동안 탐진치에 몸을 맡기셔서 아집이 아주 강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한 아집은 나를 빼놓고 많은 것들을 나쁘다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집은 생명체가 마땅히 가질 당연한 성질이기조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 성질을 이겨내고 버릴 수 있는 것이죠.
도입부에서 제가 어떤 자세로 마음을 봐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중요시 하셨습니다. 내 인생에 나타나는 것들을 선하고 악하다 분별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리고 내 마음까지도 분별심으로 밀어내거나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까지도 그저 대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그 말씀을 인생에 다가오는 것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주가 머물다 가는 이들에게 공평하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은 것이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해 보였습니다. 태양이 태양계의 99.9프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듯이 생명의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우주의 불공평과 불균형이니까요.
이번 편을 맺기 전에 보왕삼매론의 구절 하나 전해드리고 싶네요.
‘인생에 고난이 없길 바라지 말 것이며, 사랑에 갈등이 없길 바라지 마라.'
다음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