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by nangbii

비상계엄이 선포(?)된 시점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꽤나 오래 걸렸지만 우리의 바람대로 탄핵은 결국 이루어졌고, 계엄을 발표한 대통령은 내란 특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아직 멀었지만 여러 부분에서 ‘정상화’되어 가는 중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12월 계엄 발표가 있었던 이후로 마음이 꾸준히 불편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헐뜯고 욕한다. SNS에는 말도 안 되는 혐오와 증오의 댓글들이 넘쳐난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게시물의 댓글창을 굳이 열어 사람들이 배설하 듯 벌려놓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계엄 하나를 성공 못 해 나라가 공산당이 되어가네. 그대로 그냥 쭉 밀어 버렸어야지! 결국 이 나라는 꼴페미 때문에 망한다.'라고… 상식과 보편도 모두 사라져 버린 공간에서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띵-’하다. 나도 똑같이 욕을 퍼붓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상식적인 댓글을 쓴 해당 계정을 들어가 보면 정작, 모두 ‘부계정’이나 ‘비공개’로 자기 자신을 숨긴 이들이다. “키보드워리어. 바깥세상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만다.


일터에서는 계엄에 대해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나는 동료들과 이번 계엄에 대해 욕하고 싶었지만 정말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렸다. 아마도 그 이유는 사장님과 사모님도, 그의 아들인 차장님도 모두 맹목적으로 국민의 힘을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재명이가 사람을 죽였잖아. 민주당이 정권 잡으면 나라 망하는 거예요~” 일을 하는 동안 사장님은 늘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은근한 듯 노골적으로 내비치셨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나는 몹시 불쾌했지만, 사장님이라는 이유로, 또 나의 이모부라는 이유로 늘 잘 모르는 척 웃어넘겼다. 바로 전날 여의도에 다녀온 나는 그 사실을 그들에게 철저하게 숨겼다. 일터의 모든 사람에게 내 카카오톡의 프로필사진들 모두 비공개로 바꿔버렸다. 내 모습 하나라도 보여주면 내 생각까지 읽히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 시기 내 친구 유종이는 연락이 안 됐다. 나의 문자도 전화도 받지 않았고 한참 뒤의 “나중에 연락할게.”라는 문자가 전부였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유종을 아는 다른 친구 동빈에게 그의 근황을 물었다. 잠시 뒤 동빈은 내게 절대, 절대 말해선 안된다며 힘겹게 유종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12월 ‘그 시기’ 때부터 유종은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 꾸준히 나갔다고 했다. “선글라스 낀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성조기를 들고 멸공을 외치는 그 집회를 말하는 거야?” 그렇다는 동빈의 말에 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친구 유종이 어째서. 대체 왜. 나는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유종은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무엇이 내 친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은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STOP THE STEAL’ 피켓을 든 채 추위에 떨고 있는 유종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동안 밤마다 유튜브 라이브를 틀어 한남동 사저 앞 젊은이들 사이의 유종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 곳에 유종은 없었다.


아주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유종은 8년 전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동안 유종은 내게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엄청난 배신감이 들었다. 정치적인 생각이 다르다는 것도, 지금까지의 모든 사실을 나에게 철저히 숨겼다는 것도 정말 괘씸했다. 나는 정말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해 왔는데…


추운 겨울이 끝나고 여름이 오는 동안에도 유종은 여전히 내 전화도 문자도 거부했다. “잠깐 잠수 좀 탈게.”라는 말이 전부였다. 나는 무엇이 기분 나쁜 걸까. 그동안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종과 서로 달라서? 아니면 그동안 나를 철저하게 숨겨왔던 사실이 분해서? 근데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이 맞을까? 복잡하다.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없는 이 녀석이 안쓰럽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SNS에서 익명으로 자신을 숨기고 비상식의 비난과 혐오의 말을 하는 것, 유종이 친구에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 내가 일터에서 나를 숨긴 것이 모두 마찬가지가 아닌가. 모두들 자신을 숨기고 있으니까… 이들은 모두 이름을 숨기고, 정치적인 생각도 숨기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숨겼다.


나는 어제 결국(?) 유종에게 문자로 무턱대고 찾아가겠다고 했다. 6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이제 그만 나의 소중한 친구가 내게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왔으면 좋겠는데.”라는 문자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또 어지러워졌다. 유종은 지금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유종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너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널 걱정했는지 알아?' 나 또한 그들처럼 나를 숨기고 유종을 대하지 않을까. 내가 뭐 대단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투사도 아니고, 난 단지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인데…


사실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유종이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내 마음을 조금은 보여줄 수 있을까. 나도 솔직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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