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만 잊어주세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내가 아직도 혜원을 가끔씩 생각하는 것은 그저 미안한 마음만은 아닐지 모르겠다. 이 십대 나의 철 없던 행동들이 모두 돌아와 나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말도 안되는 유치한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늘 그렇다. 열 아홉 살에 만나고 스무 살에 헤어진 혜원. 그러고 군입대 후, 나는 다시 혜원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두 번의 만남과 두번의 헤어짐. 분명 혜원은 잘 지내고 있다. 나에 대한 안좋은 기억들은 모두 잊고 잘 지낼 것이다.
<열아홉 고3 수능이 끝나고, 스무 살 그 사이의 기억. 나는 걔네 집 방 침대에 앉아 그 아이의 물건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줌마가 그 아이를 불렀다. 그리곤 잠시 뒤 그 애는 방으로 무언가를 들고 왔다. 무지막지하게 큰 배 한 알이 쟁반에 올려져 있었다. '자, 이제 내가 이걸 깎아 줄게' 그 애는 자기 얼굴보다 큰 배를 조그맣고 퉁퉁한 하얀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깎아 내려갔다. 그 아이의 손가락 기억. 큰 배를 숭덩 조각내어 나에게 하나 주고 그 애도 하나 가져가던 그 모습 기억.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던 그 애 얼굴 기억… 핑크색 커튼, 핑크색 침대 이불, 피아노, 책장 서랍. (08.12.27)>
피아노를 잘 치는 혜원은 교회에서 반주를 담당하고 나의 옆 학교 밴드부에 소속되어 베이스도 연주 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 입고 있는 교복 넥타이를 서로 바꾸어 메고 다녔다. 색이 다른 넥타이가 우리를 서로 연결 해주는 기분이 들어서 마냥 좋았다.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비록 얼마 남지 않은 고3이었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에 가더라도 오래도록 서로를 생각하고 함께 할 거라 약속했다.
스무 살 신입생이 되어 대학생활에서 많은 친구들과 친해지고 나는 점점 혜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일주일에 한번씩 인천으로 돌아와 만나는 데이트도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지고 만나는 횟수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6월.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헤어졌다. 갑자기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하는 나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가 혜원은 많이 힘들어 보였다. 왜 헤어지는 것이냐 이유를 물어보자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어...”나는 혜원에게 담담하게 답했다.
그 뒤로 나는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군대에 있을 때 가끔씩 혜원이 생각났다.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했던 내 모습이 이기적이고 참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병일 때 혜원의 오빠가 헬리콥터를 타고 나의 숙소를 기관총으로 난사 (그 시절 혜원의 오빠는 아파치 헬기를 조종하는 육군 중사였다.) 하는 장면을 꿈꾸기도 했던 것 보면 나의 죄책감은 꽤나 컸던 것 같다. 아니면 그저 무서웠을 지도 모르겟다. 일병 즈음 나는 그 때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계속 혜원이 꿈속에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혜원에게 연락을 했다. 휴가를 나와 혜원을 만났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사귀게 되었다. 혜원은 나와 헤어진 이후로 많은 방황을 했었다고 했다. 진로가 고민이었고 혜원은 늘 자신이 외롭다고 말했다.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앞으로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군대에 있을 때. 모두 잠든 새벽시간, 나는 몰래 막사를 나와서 공중전화로 혜원에게 전화 했다. 첫눈이 내린다고 내가 말했다. 어떻게 이 시간에 전화할 수 있냐고 놀랐던 혜원에게 웃으면서 나는 말했다. 또 다시 너를 배신 하지 않겠다고. 혜원이 웃었다. 영원한 것은 없겠지만 정말 오래도록 혜원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혜원은 2주에 한번씩 나를 보러 부대로 면회를 왔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를 위해 혜원은 자신이 학교에서 공부하던(혜원은 조리를 전공했다.) 전공책을 가져와서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했고 지난주 다녀왔던 락페스티벌 이야기도 해주었다. 새롭게 알게 된 다양한 락밴드들의 이름을 내게 말해주고 함께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제대 하면 함께 락페스티벌에 가자고 했고 우리는 여러 계획들을 세웠다.
하지만 제대한 뒤 얼마 못 가 나는 또 혜원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오래 전 일들이라 헤어졌던 이유를 알기는 힘들지만 그 시절 나도 꽤나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제 더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니.” 혜원은 물었고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망치듯 나와 택시를 타고 혜원과 멀어졌다. 그 이후로는 혜원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혜원은 나를 아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스물여섯. 헤어진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집에 들어가는 길에 혜원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과라도 해서 내 마음이 편하고 싶었다. 아직도 미안하다고. 내 멋대로 행동하고 나만 생각했다고 혜원에게 말했다. 다 지난 일들을 가지고 사과하겠다고 전화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혜원은 “나는 모두 잊고 잘 지내니 너도 잘 지내.”라고 말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베이스기타를 한 대 사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큰 크기의 전자기타. “이건 베이스야.” 그시절 열아홉의 혜원이 내게 말해주었다. 칠 줄 아느냐고 내가 묻자 혜원은 그 자리에서 베이스를 메고 멋지게 줄을 튕겨 댔다. 베이스가 멋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시절부터 일것이다. 내게 들려주었던 록 음악들을 유튜브로 틀어놓고 둥둥둥 줄을 튕겨본다. 혜원은 잘 쳤는데 나는 쉽지 않다.
우리가 잘 가던 떡볶이집, 카페를 가끔씩 갈 때면 나는 아직도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전과자 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매년 다니는 락페스티벌에서 혜원을 마주치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 하려나. 혜원을 또 마주치게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혜원은 내게 뭐라고 말할까. 나는 미안했다고. 아직도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혜원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