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테이프와 파이프를 옮기고

by nangbii

수없이 많은 테이프와 파이프를 옮기고


내가 이모부의 말을 따라,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린시절 이모네 집은 19층에 있는 50평짜리 아파트 였다. 엄마가 데리고 간 효성동 현대아파트. 이모네 집 거실에는 고급진 갈색 소파와 엄청나게 큰 텔레비전, 이모부의 골프용품이 7살 의 나를 압도했다. 누군가 내게 “절대로 아무것도 건드려선 안돼.”조용히 말하는 것 같았다.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몽쉘도, 엑설런트도 먹고 싶을 때 마음껏 꺼내 먹을 수 있었고 티비가 두 대라 항상 투니버스를 볼 수 있었다. 이모네 집은 부자였고, 그래서 나는 막연하게 어린시절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나의 생일잔치에 장사를 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 이모가 참석했던 적이 있다. 한복을 입은 이모에게 나는 우리 엄마인 척, 볼에 뽀뽀 했다. 매일 큰 소리로 다투는 엄마와 아빠와는 다르게, 이모와 이모부의 대화 음성에는 항상 부드러움이 있고 교양이 있었다. 그게 부러워 보였고 부자가 된다면 나도 저런 교양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7살, 그날의 나는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지만 거친 손과 뚱뚱한 우리 엄마 대신에 예쁘고 날씬한 이모가 와서 좋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교양프로그램 피디 일을 5년 동안 했었다. 2년간 힘들게 조연출의 과정을 거친 뒤 아침방송 10분짜리 코너 한 꼭지를 맡게 되었다. 피디로서 ‘입봉’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매주 다양한 사건사고, 생활정보, 휴먼스토리를 찾아 발로 뛰며 취재하고 촬영하고 편집 했다. ’영등포 대박 맛집의 비결’, ‘부산의 어느 알박기 현장’, ‘청와대 앞 전광훈 목사의 심야집회’, ‘어느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등… 아주 다양하고 광범위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아침방송 특성상 시청자들의 이목을 티브이로 집중 시켜야 했기에 나는 조금이라도 더 사실보다 과장해야 했고 더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 했다.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내가 한 주 동안 발로 뛴 만큼, 뻗친(취재 특성상 잠복이 많다.)만큼 만족 할만한 결과물이 나와 굉장히 보람찼다. 나와 동료들은 그것을 창작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주제작사 소속 프리랜서 피디였기에 급여는 말도 못 하게 적었다. 창작자가 힘들게 만들어낸 프로그램은 하나의 상품이었고, 방송국은 제작사에게 그 상품을 값싸게 사들였다. 나는 제작사에 적은 임금을 받고 나쁘지 않은 상품을 부단히 만들어냈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 분명 이상한 구조였지만 그 이상한 구조는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나는 미래의 내 아이 졸업식도, 생일잔치도 못 가는 아빠가 될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아빠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나는 주말마다 운동도 하고 싶었고 와이프에게, 가족에게 충실한, 여유 있는 부자 아버지의 삶을 살고 싶었다.


어느 날, 그날도 밤새 가까스로 편집을 끝마치고 본사에 테이프를 넘겼다. 겨우 생방송 송출을 완료한 아침, 이모부에게 전화가 왔다. 이모부가 당신이 하는 일을 배워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내게 말씀하셨다. “3-4년 내 밑에서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는 너 가게를 차리는 거야.” 건축설비자재판매 사업이 쉽지 않을 거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모부가 하는 일을 한다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이의 생일잔치에도 갈 수 있는 삶 말이다.


나는 그렇게 3년동안 열심히 일했다. 수없이 많은 시멘트, 벽돌, 파이프, 여러 자재를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몸이 망가져 가도, 말도 안되는 부당한 상황들이 내 앞에 일어나도 나는 나의 미래를 위해서 참았다. 하지만 아침 7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의 고된 노동과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격주의 토요일 근무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휴식시간도 없고 에어컨 한 대 없는 한여름의 땡볕과, 살을 에는 한겨울의 새벽 바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모두들 군말 없이 일했고, 그것은 방송일을 했을 때 주변 동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 했다. 상대가 큰 기업이라도, 10인 미만의 중소기업이라도 그 안에 종속되어 있는 이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회사의 압도는 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참고 참았지만 나는 결국 포기했다.


“존버”가 답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일터에서의 동료들은 지금 모두 존버 중이다. 존나 버티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나는 이모부처럼 부자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내 아이의 졸업식도, 생일잔치도 참석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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