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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독백 Apr 12. 2024

그때 거기에 네가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두 팔은 고된 움직임으로 아직도 불뚝거린다. 그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후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성인 걸음으로 고작 3분 거리이지만 휠체어에 앉은 그에게는 어림도 없다. 오늘도 버스를 놓쳤다. 그렇다고 손자인 그도 기억 못 하는 할머니를 혼자 두고 나올 수도 없고. 앞으로 20분 동안 매연과 찌는 듯한 공기를 마실 생각을 하니 그는 답답했다.


버스 정류장 바로 뒤에 한적한 커피숍이 있었지만 소박한 그의 주머니로는 얻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의 눈길은 저절로 얼음가루에 달콤한 시럽과 팥을 얹은 빙수로 향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언저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속 뜨거운 열기까지는 식혀주지 못했다.


그는 발판 아래로 떨어져 있던 오른쪽 다리 들어 올려 고정시켰다. 그의 다리는 손이 닿는 느낌을 알아채지 못했다. 끝 모를 잠에 빠진 것처럼. 문득 그는 휠체어에 놓인 앙상한 나무토막을 내려다보며 먹먹한 소리와 통증으로 가득했던 날을 떠올렸다.


가지 말걸. 몇 푼 벌겠다고.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뒤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내리치던 느낌, 빛으로 가득했던 수술실과 주름살을 타고 번지던 할머니의 눈물이 떠올라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다리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되뇌며 비쩍 말라버린 다리 대신 굵어진 두 팔을 보았다.


실오라기 같은 아지랑이를 헤집고 차들이 달렸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내뿜는 반사광이 모스부호 같았다. 그는 그것이 삶에 맺힌 저주를 풀어주는 주문이기를 바랐다. 부모님의 차 사고, 할머니의 치매, 그리고 자신의 다리.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데도 삶은 계속해서 그를 다그쳤다. 종잡을 수 없이 몰아치던 삶의 사건은 그가 무언가를 잃고 나서 비로소 깨닫는 시점에, 무소유로부터 소유를 가르쳤다. 그는 감사하려고 했다. 아니 그것이 또 다른 재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그의 앞에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그는 얼른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하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내린 사람이 엉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비켜달라는 말에도 사람들은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로 속으로 나가기를 꺼렸다.


그때 갑자기 그의 휠체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그의 휠체어를 버스 쪽으로 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의 옆면을 두드렸다. 닫히려던 버스의 문이 열리고 그녀는 그의 휠체어를 있는 힘껏 밀어 올린 후 버스에서 내렸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짙은 눈에 맑은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버스는 엔진 소리를 내며 떠나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가슴께에 있는 명찰이 보였다. 한지수. 그는 얼굴과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버스 창 너머로 사라지는 지수의 얼굴을 그는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투둑 툭. 그는 빗방울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다. 10여 년 전 지수를 처음 만났던 날엔 무척이나 더웠는데. 이제 그는 말하고 싶었다. 그때 거기에 네가 있었어. 그는 결혼식과 12시간의 비행 후 곤히 잠들어 있는 지수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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