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소녀는 서른을 향해 가고 있다. 여전히 열다섯의 얼굴을 하고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입술을 만지거나 어색해하며 하하 웃을 때면 할아버지 옆집 소녀인 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난 친구이자 연인으로 그녀 곁에 머물렀다. 늘 씩씩하고 무슨 일이든 혼자 해결할 듯 보이지만 십 대의 홍이는 친한 친구와 마음이 틀어졌을 때나 부모님의 서먹한 관계가 의식될 때 나를 찾았다. 이십 대 때는 좀 더 자신의 삶에 집중했는데 이를테면 자기를 두고 먼저 결혼해 버린 친구들 이야기를 갖고 내게 오곤 했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 그녀는 나와 미래를 함께 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리를 닮은 아이들과 함께. 그것이 내가 그리는 꿈이었고 언젠가는 현실의 나와 겹쳐질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유학에서 돌아온 뒤 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홍은 가슴 어딘가에 생채기를 품은 사람처럼,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나는 물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끌고 와 내게 기대게 할 수가 없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자신의 몸을 뉠 은밀한 곳을 찾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시간이 홍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다 그녀가 더 이상 내디딜 힘이 없을 때 내게 데려다주었으면 했다. 숱한 기다림의 시간이 가르쳐 준 것처럼. 그녀는 내게 올 것이라고.
가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눈가가 불그스름해지는 찰나에 서걱, 가슴이 베인다. 그럴 때마다 되뇐다. 과거를 짊어진다고 해도 괜찮아, 그녀와 마주하는 건 미래고 나일 테니까. 오늘도 홍은 내 전화를 피하는 것 같다. 그래, 내가 기다릴게.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속 '민준'의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자, 남자 주인공의 애틋함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같은 자리에서 여자 주인공을 기다리는 민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상대를 향한 마음이 서로 다른 곳으로 흐를 때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아린 시절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단맛이 느껴집니다. 두 주인공만큼이나 민준에 신경이 쓰이는 제 모습, 이걸 바라보는 재미 또한 있었습니다. 가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