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필름카메라 출사

소소함을 진중하게 한순간을 소중하게 모든 순간을 잔잔하게

by 낭말로
필름 첫장

얼마 전, 봄 꽃이 피기 시작했을 무렵 사진을 좋아하시는 누나분과 함께 필름카메라 출사를 다녀왔다. 평소에 디지털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여러 군데를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익숙했는데 간만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출사였다. 누나가 선뜻 필름카메라까지 빌려주셨다.

장소는 홍제천에서 한강을 지나 망원동까지. 꽃이 서서히 피어나는 즈음 햇살 가득한 봄의 시작을 담기에 최적의 루트였다. 근 3년간 미러리스를 들고 다니며 해마다 서울 곳곳 벚꽃을 찍으러 여느 별의별 핫플레이스를 다녔는데 홍제천은 처음이었다. 나 서울 사람 맞나 싶었다. 집 근처 중랑천 벚꽃길이 떡하니 있어서 그런지 홍제천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막상 더 큰 벚꽃 풍경을 찍으러 간다 하면 올림픽공원이나 석촌호수 같은 곳을 갔다. 당시 나한테는 휴일이었던 수요일, 역시나 평일이었기에 홍제천은 조용했다. 가장 크게 들려왔던 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산책하시는 어르신분들의 대화 소리. 마치 절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금선사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이런 소소하고 잔잔한 시청각 경험을 할 수 있는 건 극히 드물기에 매우 소중하기도 했다.

필름카메라를 처음 들고 좀 어색해서 적응하기 바빴다. 그래도 미러리스를 나름 다뤄 봐서 그런지 작동 방식은 완전히 달라도 금방 이내 익숙해졌다. 그래도 카메라는 카메라라서 재미도 있고 흥미로웠다. 필름 하나하나가 비싸서 그런지 한 장 한 장을 더욱 소중히 천천히 찍게 된다는 누나의 말에 금방 수긍을 하고 급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소에 미러리스를 들고 다니면 급하게 여기저기 찍기 바빴다. 초반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는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던 것 같은데 시간 지나 점점 사진을 찍을 때도 급한 성격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한창 인스타그램으로 관심 받기 시작할 때쯤 급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으로 받는 큰 관심에 놀라며 설레어 하고 그만큼 사진에 진심이 들어가니 여러 갈망과 집착이 여실히 드러난 것 같다. 사진으로 잘되어 보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여러 행복한 상상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뚝 떨어지는 관심을 보고 오히려 더 조급해졌던 것이 해악이었으려나, 마음을 더욱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상상한 신기루였음을 자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셔터를 누르지는 않았다. 나도 내 시야와 줏대는 있으니까 말이다. 미러리스의 편리성도 내 급한 마음에 제격이기도 했다. 바로바로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여러 기능들로 서포트해 줄 건 다 해주는 게 디지털 카메라이니까. 근데 필름카메라는 달랐다.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조차 할 수 없고 무조건 현상소에 가서 필름을 전달하고 시간 지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조급함 전혀 없이 그저 잔잔한 진득함만을 품고 있는 것이 필름카메라였다.

누나와 홍제천을 걸으며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집중하며 찍었다. 찍다 보니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러리스를 처음 들고 사진을 찍었던 그때가 확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갈 만한 풍경들이 더 자세히 보이고, 사람들의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유난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류애가 다시 회복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러리스로 슬쩍슬쩍 찍었던 때와는 다르게 한 순간 한 순간을 집중하며 찍고 있으니 그 순간을 찍는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문제는 카메라와 사진이 아니라 그걸 찍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충 훑어보았으니 사진도 그에 따라 거기서 거기에 머물지 않았겠는가 싶었다. 소소한 세상의 모습을 진중하게 담았어야 될 것을, 그저 단조로운 풍경 사진 하나로 한탕을 노리고 잘되어 보려 했다니 스스로 많이 쪽팔렸다.

이날 필름카메라가 준 경험은 내 사진 가치관에 매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필름카메라를 빌려주신 누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올린다.


빌려주신 카메라로 찍은 이번 중랑천에서의 사진들

소소함을 진중하게 한순간을 소중하게

모든 순간을 잔잔하게


스스로 만든 이 문구를 늘 되새기며 앞으로의 사진들을 찍어 나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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