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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Oct 26. 2023

손금

덜어낸 게 있었다면

손금 좀 볼까

아빠가 어린 내 손을 잡고 손이 아니라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아현동의 마루에 앉아서였는지 함께 종로서적에 가던 버스 안에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봄이었을 거라는 거, 입은 옷보다 햇볕이 따뜻해서 등이었는지 이마였는지가 따뜻했던 기억만 난다. 나는 큰 비밀이라도 알게 되는 게 아닐까 가슴이 두근댔다. 아빠가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을 나는 마주 웃지도 않고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분홍색 손바닥에 붉은 선들과 푸릇한 핏줄이 비치는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나의 손금을 나도 처음 보듯 내려다보았다.

응 우리 **는 엄청 똑똑하고 건강하게 장수하겠는데, 결혼도 잘하고 아이도 둘을 낳고 아주 잘 살겠네. 그래도 오십이 넘으면 나쁜 병을 조심해야 해

그 작은 손바닥에 정말 그런 게 다 들어 있다고? 정말?

남편은 눈썹이 짙고 아들은 엄청 똑똑해서 교수가 될 거고 딸은 엄청 예뻐서 다들 쳐다볼 거라고. 아빠는 내 손을 잡고서 한참이나 더 긴 이야기를 했다. 손바닥의 붉고 푸른 선들이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청진기를 대고 듣는 것처럼 한참이나.

내 손바닥에 아빠 손바닥을 대고 깍지를 껴서 손을 잡고 깍지를 풀고 아빠에게로 물러나서 나는 생각에 빠졌던가. 나쁜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데 나는 좀 무서웠던 것 같다. 이미 무언가 정해져 있고 나는 이미 그 가느다랗고 이리저리 얽힌 선들 위에 바둑돌처럼 놓여 있구나. 똑똑하고 장수하고 사랑받고 산다는데 이상하게 조금 슬프기도 했다. 그 이야기에 아빠는 없었다.

그럼 아빠는? 왜 묻지 않았지? 그야 몰랐으니까.

아빠는 내가 스물셋에 돌아가셨다. 나더러 건강을 조심하라던 오십 살에.

아빠는 내게 부드럽던 손바닥과 내가 꼭 쥐고 다니던 엄지손가락, 짙은 눈썹 위로 빗어 올리던 윤기 나던 머리칼이다.  

아빠가 말한 것처럼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예쁜 딸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는 내게 오래 해 준 이야기들은 죄다 틀렸지만 그때의 두렵고 슬펐던 감정은 지금도 뚜렷하다.

손바닥을 보면, 이제는 나이 들어 복잡하고 쭈굴거리는 손금들은 나에게는 어떤 말도 들려주지 않는다. 아빠가 말해준 것처럼 건강하게 장수하게 될까. 조금 나은 재료로 된 음식을 골라 먹고 운동도 조금은 하지만 자신은 없다. 아빠도 아빠가 오십에 죽어버리리란 걸 몰랐던 것처럼.

아빠의 손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도 조물 거리고 잡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 손바닥에 손바닥을 겹치고 아빠의 좋은 운을 내게 새겨 덜어준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인데.  

생각나는 것은 병실에 앉아 내려다보던 붉고 푸르던 손바닥의 점들, 얼룩들. 또 세상 어떤 것보다 차갑던 죽은 아빠의 손, 그 감촉.

언젠가 다시 만나면 부드럽던 그 손에 깍지를 끼고 엄지를 쥐고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봐야지. 손금은 보여주지 않을 거야. 슬퍼질지도 모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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