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한 날들
설연휴다. 어제는 오래오래 어려웠고 어느 순간은 가엾었고 한동안 내 몸보다 더 아꼈던 어머님이 가셨던 날. 벌써 9년이 되었다.
그제, 금요일. 당일에 봐야 하는 장을 마트가 열리기를 기다려 다녀와 종일 그것들을 다듬고 씻고 무치고 볶고 손으로 짚어가며 가시를 바르고 다지고 뭉치고 온몸이 기름 냄새에 절도록 부쳤다.
전보다 더하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인데 좀 힘들었다. 다리가 붓고 허리가 아팠다.
어제 일찍 산소에서 차례를 겸한 기제사를 드리고 늦은 오후에는 엄마한테 가서 종일 만두를 빚었다. 먹기 싫다는 내 입에 만두를 쪄서 넣어주고 입에 가득 만두나 사과, 불고기 같은 걸 넣은 채로 눈을 흘기는 나를 못 본 척하는 엄마.
오랜만에 느지막이 11시 예배에 가는 중이다. 드문드문 빈 낡은 좌석에 며칠 전과는 다른 햇빛이 떨어진다.
“이거 용산에 갑니까?”
옆 좌석에 앉은 이에게 내릴 곳을 어린 청년이 묻는다. “아, 네” 짧게 대답하는 옆 사람에게 다시 “이게 용산에 가는 1호선이 맞나요?”라고 묻는 청년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하다. 강렬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허리를 숙여 앞에 앉은 이의 얼굴을 마주하며 느리고 또박또박 묻는다. 대답해 주는 이가 여러 번 고개를 들고 그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대답한다. 얼굴과 얼굴은 30센티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가 두렵다. 청년의 표정은 익숙한 것이 아니다, 깨끗한 점퍼와 어제 깎은 듯한 머리. 대답을 듣고서도 다른 어떤 것도 쳐다보지 않고 앞사람의 얼굴에 제 얼굴을 기울여 보고 있다. 식은땀이 난다.
어렵지 않게 보았던 사건사고 기사들이 떠오른다. 앞에 앉은 청년은 어린 청년의 눈을 애써 피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귀가 새빨갛다.
용산역이다. 전동차의 문이 열리고 어린 청년이 내리지 않고 앞의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다.
왜 내리지 않지?
앞에 앉은 청년이 일어서 전동차에서 내렸다. 질문하던 청년도 뒤를 돌아서 전동차문이 닫히기 전에 따라 내렸다. 앞을 보고 빠르게 걷는 청년의 옆모습이 창문 뒤로 물러 났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쉰다.
사실 나는 그 어린 청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전동차 좌석에 앉아 그 잠깐사이 온갖 불안한 상상을 해버린 나는 불행하다, 창피해서 괴롭다.
그래도 또 혼자 기다란 좌석에 앉아 기도 비슷한 것을 해보는 거다.
그에게 눈을 흘기며 잡채를 불고기를 만두를 입에 넣어주는 손이 있었기를. 두렵다가 사랑하고 오래 아낄 사람이 있기를. 오늘은 길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