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일하지 않은 날보다 일한 날이 더 많았다
할머니와 포스틱
설 연휴에 외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해 연휴 전 주말에 잠깐 찾아뵈었다. 코로나 시대에 이르러 걱정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곁에 있지 않은 자들의 안녕은 지금 같은 시절에 더욱 염려되는 것이다. 특히 노인이라면 그 마음 쓰임이 크다. 곁에 있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어릴 때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그러니까 엄마가 엄마가 아닐 때, 할머니는 사과나무를 키우는 과수원을 했다고 했고, 할아버지가 과수원을 운영할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되어 지역을 옮겨 작은 식당 겸 슈퍼를 운영했다. 내 기억에도 외할머니의 직장은 슈퍼부터였는데, 명절이 되면 외할머니 댁에 가는 걸 좋아했다. 작은 식당도 겸하고 있어서 한 켠에는 꽃게 넣은 어묵 탕이 끓고 있었고 어느 한 켠에는 도서관 책장처럼 빼곡하게 과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집에 갈 무렵에는 할머니가 과자를 잔뜩 싸주셨는데, (지금도 나는 포스틱을 돈 주고 사 먹는 일이 없다. 나에게 포스틱은 항상 공짜였으니까) 어린이였던 나는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그렇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아쉽다. 지금이라면 깨춤을 추고 방정을 떨다가 동네 창피할 때쯤 멈췄을 텐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슈퍼도 접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시골로 돌아와서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고 계신다. (그 소일거리의 노동량이 나보다 많은 것 같지만) 여전히 미나리 밭, 딸기 밭, 고추 밭에 가서 쓸 만한 믿음직한 용역의 역할을 하고 계신 듯했다. 모르는 척 농장주가 자신에게만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고 자랑했던 걸 보면.
그렇게 할머니는 올해 여든이 되셨다. 할머니는 태어나서 어딘가 회사에 소속된 적도 없고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을 터인데 할머니의 생에서 일을 한 날은 일을 하지 않은 날보다 많다.
그런 할머니와 피자를 먹으러 갔다. 물론 할머니가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할머니가 안 드셔 봤을 법한 식당에 가자는 게 엄마의 의견이었고 카카오 지도로 주변 식당을 찾아 보고한 게 내 일이었다. 그 시골에 용하게도 화덕피자집이 있었고 로제 파스타와 상하이 어쩌고 파스타, 리코타 치즈 샐러드, 그리고 그 식당의 시그니처 피자를 시켰다. 할머니는 일관되게 표정이 좋지 않았고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만 억지로 웃었다. 나는 할머니가 한 숟가락씩만 맛 본 음식들은 남김없이 다 먹었고 엄마는 밖에서만 밥을 잘 먹는다며 면박을 주었다.(사실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았던 건 10년 전의 일일 텐데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았나 보다.)
가게에서는 피자집 사장님이 생활의 달인에 출연해 춤추며 피자 도우를 돌리는 영상이 계속해서 나왔다. 사장님은 더 이상 도우를 반죽하고 않고 서빙을 하고 계셨는데 할머니는 저 영상 속 사람이 저 사람인가 보다 하면서 신기해했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며 냉소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피자가 맛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취업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한 적 있었다. 일자리 없어 고민이다, 라든가. 중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들. 가벼운 투로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그저 사과를 깎으려 칼을 들고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모부 둘 다 멀쩡히 살아서 일하는데 뭐가 조급하냐고 사과를 두 동강 내며 말하는데 코 끝이 찡 했다. 물론 내가 어디서 사람 구실 못하고 있으면 위로라도 그런 말 못 하겠지만 어쨌든 팔십 살 노인이 조급해하지 말라니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는 포스틱 대신 용돈을 쥐여주셨다. 포스틱을 아주 많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사 먹지는 않았다. 포스틱을 이미 받은 기분이었기에.
할머니는 일하지 않은 날보다 일한 날이 훨씬 많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지만 해보지 않은 일들도 아직 많다. 일이란 뭘까 뭐길래 사람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혹은 자격 미달로 치부하고 때로는 지치게 하고 때로는 살게 하는 걸까. 할머니의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했던 필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지금의 할머니를 보면 노동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을 것이다. 노동은 할머니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그날 저녁을 지치게 하다가도 내일 아침을 살게 하니까.
일생동안 하루가 짧았던 할머니는 코로나 때문에 하루 길어졌다. 소일거리를 같이하던 동료들과도 왕래가 적은 편인 듯했다. 코로나가 앗아간 시간을 보상해줄 수 없지만 주어진 시간 할머니가 계속 노동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에게 포스틱을 주고 용돈을 주고 했던 일들은 나를 살게 했지만 할머니도 역시 살게 했다. 노동이란 누군가를 살리며 나 또한 살게 하는 것인가 보다. 할머니는 포스틱으로 나를 살렸고 나는 할머니를 무엇으로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삶이다.